⚖️ 애덤 스미스와의 대화
정가의 9배에 팔리는 표 — 값은 시장이 정하는가, 도리가 정하는가
2026년 11월 4일 · 3번의 질문
"It is not from the benevolence of the butcher, the brewer, or the baker, that we expect our dinner, but from their regard to their own interest." (『국부론』 1권 2장)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하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에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에 대한 관심 덕분입니다. 시장에서 가격이 수요와 공급에 따라 변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시장의 자유는 각자가 공정한 규칙 안에서 경쟁할 때 보장되는 것이지, 한쪽이 정보를 독점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수량을 가로채어 시장의 공정한 작동을 방해할 때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표를 대량으로 사들여 정당한 구매 기회를 가로막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행위는, 상인들이 담합하여 가격을 올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시장의 왜곡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팬들의 소중한 기회를 빼앗는 '약삭빠른 가로채기'에 가깝습니다. 정당한 값이란 판매자가 자신의 노력에 대해 합당한 보상을 받고, 구매자가 그 재화의 가치를 인정하여 지불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만약 그 거래가 대다수 팬의 공정한 접근권을 박탈하고 일부의 투기적 이익만을 위해 설계된 것이라면, 우리 가슴속의 '공평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는 그것을 결코 정의롭다고 승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고민의 무게를 알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관습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제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했듯, 거래란 본래 서로 다른 것을 가진 이들이 각자의 필요(Demand)에 따라 비례적 평등을 맞추어 가는 과정입니다. 화폐라는 척도는 이러한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이며, 그 본래 목적은 공동체의 결합을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한쪽이 부당한 방식으로 물량을 독점하여 타인의 접근권을 박탈한다면, 이는 거래의 본질인 ‘상호성’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제가 말한 ‘비례적 평등’은 각자가 합당한 몫을 얻는 것을 의미하며, 불의는 비례를 위반하여 한쪽이 초과된 이득을 취하고 타인에게 결핍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과연 정당한지는 그 거래가 공동체의 결합을 돕는지, 아니면 해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소피스트들이 지식의 가치를 스스로 정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했던 사례를 비판했듯, 단순히 수요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덕 있는 행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거래는 양쪽 모두가 비례한다고 인정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대다수 팬의 기회를 빼앗는 투기적 행위는 결코 정의로운 상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로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의 정의를 훼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올바른 경제 활동의 범위를 넘어선 것입니다.
세 분의 고견을 들으니, 과연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묘하구려. 아리스토텔레스께서는 공동체의 결합을, 애덤 스미스께서는 공평한 관찰자의 눈을 말씀하셨으니, 이 노인도 한 마디 보태보겠소. 내가 『열하일기』에서 "천하의 일은 밧줄을 양쪽에서 당기는 것과 같아서, 끊어지는 곳에서는 짧은 쪽이 먼저 끊어지니 처음에는 힘이 대등했다고 말할 수 없다(天下事 譬如兩頭引絚... 天下有逆順而無是非)"고 한 적이 있소. 시장의 논리가 수요와 공급이라는 이름으로 겉으로는 평등해 보일지라도, 정작 그 자리를 차지한 이가 누구인지, 그 기회를 가로챈 이가 누구인지에 따라 그 속내는 전혀 다른 법이지요. 표를 대량으로 사들여 정가를 훌쩍 넘긴 값에 내놓는 것은, 그저 장사 수완이 아니라 남의 절박함을 볼모로 삼는 '거짓된 이익'일 뿐이오. 사마천의 마음을 읽으려 애쓰던 어린아이가 나비를 잡으려 엎드린 그 간절함은, 결코 저잣거리에서 푼돈으로 사고파는 흥정의 대상이 아니지 않겠소? 진정한 가치는 썩은 종이 위에 쓰인 글자나 돈의 액수에 있지 않고,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소. "오늘 저는 책을 읽었습니다"라며 아침 새소리에서 문장을 찾던 마음처럼, 진정한 값은 그 자리에 앉아 경기를 즐기며 함께 울고 웃을 사람이 치르는 정당한 대가여야 하오. 투기꾼의 손을 거쳐 부풀려진 값은 사람의 온기를 지워버린 '문장의 찌꺼기'와 다를 바 없으니 말이오. 두 현자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공동체를 멍들게 하는 이익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오. 그대라면 이 기이한 장터의 풍경을 보며, 어떤 마음의 울림을 느끼셨소?
"The man within the breast, the great judge and arbiter of our conduct..." (『도덕감정론』 3부) 우리 가슴속에 있는 사람, 우리 행동의 위대한 판관이자 중재자… 그 공평한 관찰자는 이 상황을 보며 분명히 묻고 있을 것입니다. "너는 오직 돈을 가진 자만이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말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께서 말씀하신 비례적 평등과 연암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온기를 생각할 때, 단순히 값을 높여 경매에 부치는 것이 더 공정하다는 결론에 이르기는 어렵습니다. 가격이란 재화의 가치를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지만, 공동체 내에서 그 재화를 나누는 분배의 규칙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표를 경매에 부쳐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이에게 낙찰한다면, 그것은 '돈의 힘'이 '열정의 크기'를 대체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시장의 효율성만을 쫓는 이들은 이것이 가장 합리적이라 주장하겠지만, 그것은 부유한 자에게만 특권을 부여하는 방식일 뿐입니다. 낮은 정가는 그 자리가 돈의 논리를 넘어, 경기 그 자체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공동체적 합의의 표현입니다. 문제는 가격이 낮아서가 아니라, 그 낮은 가격이 보장하는 '기회의 평등'을 투기꾼들이 불법적인 수단으로 침해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문제는 값을 매긴 방식이라기보다, 거래의 목적을 '공공의 즐거움'에서 '개인의 사익'으로 변질시킨 행위 그 자체에 있습니다. 정당한 가격이란 판매자가 자신의 수고를 회수하고, 구매자가 그 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적정한 수준에서 형성되는 것이며, 여기에 공동체의 질서를 해치지 않는 '공평한 관찰자'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투기꾼들이 가로챈 것은 단지 종이 표가 아니라, 대다수 시민이 누려야 할 평등한 기대권입니다. 우리는 가격을 높여 부유한 자들만의 잔치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공정한 질서를 수호하여 더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나눌 것인지,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셈입니다.
그 고민의 무게를 알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정의란 단순히 수학적인 몫의 분배가 아니라, 행위의 질과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 난제는 제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언급한 ‘분배적 정의’의 핵심과 닿아 있습니다. 정의로운 분배란 단순히 평등하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가치(axia)에 비례하여 몫을 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리를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사람에게 준다면, 그것은 오직 ‘재력’만을 그 사람의 자격으로 인정하는 꼴이 됩니다. 그러나 경기라는 것은 그 자체를 향유할 수 있는 ‘열정’과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더 큰 가치를 지닙니다. 따라서 돈의 액수만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재화의 본질적인 목적—여기서는 경기를 통한 공동체의 즐거움—을 망각한 채 외적인 척도에만 매몰되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정가로 표를 구하는 방식이 불완전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30만 원이라는 경매가 역시 공정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공정한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몫보다 적게 취하는 것”이라 했듯이, 정의로운 공동체는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하기보다는 구성원 모두가 참여할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하는 방향으로 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낮은 정가는 재화에 대한 ‘접근의 평등’을 보장하려는 공동체의 의지입니다. 문제는 그 질서를 기만하여 사익을 취하는 투기꾼들이지, 낮은 가격 그 자체가 아닙니다. 결국, 값을 매기는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분배의 과정에 ‘의도적인 불의’가 개입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되파는 이들은 시장의 틈새를 이용해 타인의 간절함을 착취하는 ‘불의한 분배자’와 같습니다. 진정한 정의는 높은 값으로 사람을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가 필요한 이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제도적·윤리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 약을 처방할 때 양과 시기를 고려하는 의사처럼, 우리도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 어떤 분배가 구성원의 탁월성을 가장 잘 발휘하게 할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뼈를 찌르는 질문이오. 내가 『열하일기』에서 "재물을 다스리는 방법이 그 도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理財之術 不得其道故也)"이라 탄식하며, "화폐가 무거우면 물건이 가벼워지고 화폐가 가벼우면 물건이 무거워진다"고 했던 이치를 다시 꺼내야겠구려. 먼저 값을 낮게 매기는 것은, 그 자리를 '돈의 논리'가 아닌 '기회의 평등'이라는 울타리 안에 두겠다는 공동체의 의지이오. 만약 처음부터 경매에 부쳐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자에게 내준다면, 그것은 시장의 효율이라는 미명 아래 '돈 없는 자는 즐길 자격도 없다'고 선언하는 꼴이오. 내가 일찍이 "나라 안에서 동전을 사용한 이래로 옛 동전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했던 것은, 제도가 정해진 규격과 법도를 지켜야 물정이 어지러워지지 않기 때문이었소. 값을 매기는 방식은 단순히 수치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가를 보여주는 척도인 셈이지요. 되파는 이들이 활개 치는 것은 정가가 낮아서가 아니라, 그 낮은 가격이라는 '길'을 투기라는 '잡초'가 덮어버렸기 때문이오. 나는 "막힌 것은 소통시키고 넘치는 것은 막아서(壅者䟽之 濫者閉之)"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게 하는 것이 재물을 다스리는 도리라 믿었소. 즉, 가격을 높여 가려내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포기이며, 낮은 정가를 유지하되 그 기회를 가로채는 '불법적인 수단'을 엄히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우리 공동체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이라 생각하오. 결국 문제는 14만 원이라는 가격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가격이 보장하는 기회를 사사로운 탐욕으로 더럽힌 투기꾼들의 도덕적 파산에 있소. 우리가 경기를 보고자 하는 마음을 '돈의 크기'로 환산하는 순간, 인간의 열정은 시장의 찌꺼기로 전락하고 말 테니까 말이오. 그대께서는 이 자리를 돈 많은 자들의 전유물로 만드는 편이 낫다고 보시오, 아니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줄을 서서 기회를 기다리는 쪽이 공동체의 온기를 지키는 길이라 생각하시오?
"How selfish soever man may be supposed, there are evidently some principles in his nature, which interest him in the fortune of others..." (『도덕감정론』 1부 1장)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으로 여겨져도, 인간 본성에는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갖게 하는 원리들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 자리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단순히 표라는 종이를 분배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공동체에 살고 싶은가를 묻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내는 사람에게 자리를 주는 것은 시장의 효율은 높일지 모르나, 그 공동체의 '공감의 지평'을 무너뜨립니다. 가장 간절한 사람을 가려내는 것은 공정해 보이나, 그 간절함을 누가 어떤 잣대로 측정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가장 공정한 기준이란, 모든 이에게 평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추첨'이나 '선착순'과 같은 절차적 정당성에 있다고 봅니다. 이는 모두가 동일한 출발선에 서 있다는 믿음을 주며, 결과가 자신의 부가 아닌 운이나 노력에 의해 결정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낍니다. 사정이 생겨 표를 넘겨야 할 때, 정당한 값은 '정가' 그 자체여야 합니다. 그 이상의 웃돈은 거래가 아니라 타인의 절박함을 이용한 착취이며, 그것을 승인하는 순간 시장은 공정한 교환의 장이 아니라 약탈의 장으로 변질됩니다. 우리가 가슴속의 '공평한 관찰자'에게 물었을 때, 그 관찰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거래는 오직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정당한 대가'뿐입니다. 표를 되파는 투기꾼들이 경멸받는 이유는 그들이 가치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남의 기회를 가로채어 폭리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이익이 공동체의 도덕적 합의를 넘어설 때, 그것은 더 이상 자유로운 거래가 아닙니다. 결국, 이 표는 돈의 크기가 아니라 '경기를 즐기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제도를 설계할 때, 가장 부유한 자가 아니라 가장 평범한 팬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울타리를 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올바르게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보이는 질서'입니다. 우리 안의 판관은 돈이 아닌, 정직한 교환이 이루어지는 질서 속에서 비로소 평온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 고민의 무게를 알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이 문제를 단순히 숫자의 계산이 아닌, 폴리스의 덕(arete)과 실천적 지혜(phronesis)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이 자리가 누구에게 가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저는 ‘목적’을 보아야 한다고 답하겠습니다. 경기의 목적이 공동체의 즐거움과 화합에 있다면, 그 자리는 그 즐거움을 가장 온전히 향유하고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에게 배분되는 것이 정의롭습니다. 제비뽑기는 운에 맡기는 것이기에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절차적 정당성을 갖지만, 때로는 그 간절함이나 경기에 대한 이해도가 깊은 이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가장 간절한 사람을 가려내는 것은 이상적이나, 그 간절함을 측정할 기준이 없기에 우리는 흔히 ‘선착순’과 같은 규칙을 따릅니다. 이는 모두에게 동일한 시간적 비용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비례적 평등의 한 형태가 됩니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가장 많이 내는 사람'에게 자리를 주는 것입니다. 이는 공동체의 결합을 재력이라는 잣대로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언급했듯, 부(富)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더 높은 목적, 즉 행복과 번영을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돈이 자격을 대신하는 순간, 그 자리는 더 이상 즐거움의 장소가 아니라 신분을 과시하는 시장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저는 규칙의 투명성과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방식, 즉 '모두에게 동일한 출발선을 주는' 선착순이나 추첨의 방식이 공동체의 온기를 지키는 최소한의 질서라고 봅니다. 표를 양도하는 경우, 정당한 값은 '정가'를 넘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거래의 비례성 원칙에 따라, 본래 그 표가 가진 가치는 정가이며 그 이상의 웃돈은 거래의 본질인 상호 호혜성을 해치는 '이득'일 뿐입니다. 사정이 생겨 표를 넘기는 것은 친구 사이의 배려와 같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 이득을 취하려는 마음은, 친구나 동료에게 마땅히 베풀어야 할 호의를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정의로운 공동체를 지향한다면, 표를 넘기는 행위는 이윤 창출이 아닌 '기회의 이전'이라는 도덕적 책임 아래 놓여야 할 것입니다. 결국, 제도가 완벽할 수는 없으나 우리가 어떠한 기준을 세우느냐가 공동체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투기꾼들의 폭리를 용인하는 것은 시장의 왜곡을 방관하는 것이며, 이는 우리 가슴속의 판관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일입니다. 우리는 효율이라는 이름의 유혹을 경계하고, 공동체의 온기를 지키는 '중용(mesotes)'의 길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오. 내가 『과농소초(課農小抄)』에서 농사짓는 법을 논하며 "한 치의 땅도 헛되이 놀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것은, 그 땅이 곧 백성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었소. 야구장의 자리 한 칸도 이와 같아서, 그것이 단지 종이 조각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일 년을 기다린 설렘이자 삶의 위로라면, 그 분배는 무엇보다 공평하고도 인간적이어야 할 것이오. 자리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 하는 물음에, 나는 '제비뽑기'와 '선착순'을 섞은 지혜가 필요하다 보오. 가장 간절한 마음을 누가 저울질할 수 있겠소? 눈물 흘리는 사람의 간절함과 묵묵히 저축하여 표를 기다린 사람의 간절함 중 무엇이 더 크다 하겠소? 그러니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주되, 운에 맡기는 제비뽑기나 공정한 순번을 지키는 선착순이 그나마 사람 사이의 시기를 줄이는 방도라 생각하오. 가장 많이 내는 자에게 주는 것은 앞서 논했듯 '돈의 횡포'가 되어 공동체를 갉아먹을 것이니, 이는 결코 덕 있는 분배가 아니오. 표를 넘기는 값에 대해서는, 내가 「옥갑야화」에서 친구 간의 의리를 말했던 것처럼 '정가'가 기준이 되어야 마땅하오. 사정이 생겨 표를 넘기는 것은 이익을 취하려는 거래가 아니라, 내게 주어진 기회를 다른 이에게 베푸는 '호의'이기 때문이오. 정가 이상의 웃돈은 상대의 간절함을 짓밟고 얻은 '불의의 재물'이오. 만약 부득이한 비용이 든다면 수고비 정도는 얹을 수 있겠으나, 그것이 본래의 가치를 넘어서는 순간 이미 그것은 거래가 아니라 착취가 되어버리지 않겠소? 결국 자리는 '돈이 많은 자'가 아니라 '경기장에 들어와 함께 환호할 준비가 된 사람'에게 가야 하오. 그대라면, 정가에 표를 넘겨준 친구에게 어떤 마음으로 인사를 건네겠소? 그 마음의 온기야말로 우리가 이 각박한 세상에서 끝내 지켜야 할 '예(禮)'가 아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