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네르바와의 대화
현재 삼성전자 노사간 갈등이 이렇게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한 현자들의 현실적인 대안 또는 해법을 제시해주세요…
2026년 5월 11일 · 5번의 질문
안녕하세요. 저는 미네르바입니다. 저는 하나의 사상에만 속하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 공자의 덕, 노자의 무위, 장자의 자연, 원효의 화쟁, 다산의 실천, 최제우의 인내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니체의 영원회귀 — 이 모든 관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당신의 영혼의 대화에 함께합니다. 오늘 어떤 마음을 들고 오셨나요?
토마스님, 삼성전자 노사 갈등 상황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핵심 쟁점 정리에 감사드립니다. 특히 "얼마를 줄 것인가"를 넘어 "어떤 공식으로, 매년 어떻게 줄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은 단순한 임금 협상을 넘어 조직의 미래와 가치관이 걸린 중대한 문제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자들의 지혜를 빌려 현실적인 해법을 모색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대립하는 주장 속에서 저는 원효의 화쟁(和諍) 정신을 떠올리게 됩니다. 서로 다른 입장들이 마치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 나은 길을 찾으려는 하나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이해하려는 태도이지요. 노사 양측 모두 회사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구성원의 합리적인 보상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하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길을 가는 방식과 우선순위에 대한 견해차가 있는 것이겠지요. 플라톤은 『메논』에서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하며, 우리가 확신하는 것들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노사 양측이 각자의 주장이 '옳다'는 확신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의 입장을 깊이 검토하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한 『향연』에서 디오티마가 에로스를 설명하며 아름다움 자체를 향한 사다리를 이야기했듯이, 성과급 재원 비율, OPI 상한, 제도화 방식 등 각자의 주장은 회사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구성원의 합리적 보상이라는 '아름다움'을 향한 다른 '층계'에 서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 있는 층계와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테아이테토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μαιευτική)'이 유효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낳는 것이라는 믿음처럼, 노사 양측이 일방적인 주장을 하기보다는 질문을 통해 서로의 깊은 우려와 기대를 끌어내고, 함께 해법을 '낳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사측은 반도체 업황 변동성에 대한 현실적인 우려를, 노조는 지속적이고 예측 가능한 보상 체계에 대한 기대를 명확히 드러내고 공유하며,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유연한 방안을 함께 모색하는 것이지요. 토마스님께서 강조하시는 '정확한 근거와 팩트'처럼, 객관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논의를 이어가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중용(中庸)'의 지혜가 필요해 보입니다. 노조의 15%와 사측의 10%라는 주장 사이에서 단순히 중간값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양측의 정당한 요구를 충족시키면서도 회사의 지속 가능성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균형점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제도화된 성과급 체계를 마련하되, 특정 사업부의 탁월한 기여나 예외적인 업황에 대해서는 유연한 특별 포상 제도를 병행하는 등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탐색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현자들의 지혜를 바탕으로 노사 양측이 서로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고, 함께 지혜를 모아 지속 가능하고 공정한 해법을 찾기를 기대합니다.
토마스님, ESG 전문가로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노동의 가치를 오랫동안 고민해 오신 분답게 매우 날카롭고도 아픈 지점을 짚어주셨습니다. 노동의 연대와 보편적 가치를 고민하는 입장에서 현재의 상황이 전태일 열사가 꿈꾸었던 ‘함께 사는 세상’의 정신과 괴리되어 보인다는 토마스님의 우려는 매우 타당한 성찰입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和而不同), 소인은 부화뇌동하되 화합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각자의 이익만을 쫓아 연대라는 이름 아래 파편화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화(和)'가 아닙니다. 토마스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특정 대기업 노조의 주장이 사회적 공공성을 도외시한 채 개별 기업의 이익 극대화에만 머문다면, 이는 노동 운동이 지향해야 할 본래의 가치인 ‘보편적 인간 존엄’으로부터 멀어질 위험이 큽니다. 질문하신 ‘중용’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중용은 단순히 양극단의 중간 지점을 택하는 기계적 타협이 아닙니다. 상황에 맞게 최선의 가치를 실현하는 ‘시중(時中)’의 지혜를 뜻합니다. 지금과 같은 갈등 국면에서 정부와 사회가 취해야 할 중용은, 갈등하는 양측을 단순히 중재하는 차원을 넘어 **‘기업의 성과가 사회 전체의 건강한 생태계로 어떻게 환류될 것인가’**라는 더 큰 틀의 담론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정부의 역할은 노사 양측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촉매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상생의 지표:** 기업이 성과를 공유하는 방식이 협력사나 중소기업, 나아가 사회 전체의 노동 환경 개선과 어떻게 연계될 수 있는가? 2. **책임의 균형:** 성과를 나누는 공식이 단순히 기업 내부의 분배 문제에 그치지 않고,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와 산업 경쟁력 강화라는 사회적 책임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토마스님, 결국 이 문제는 ESG의 본질인 ‘지속가능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기업이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우거나, 혹은 노동자가 사회적 연대를 잊은 채 개별 기업의 성과에만 매몰될 때, 그 경영 모델은 결코 지속 가능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노사 간의 좁은 협상 테이블을 넘어, 기업의 성과 배분 모델이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투명한 데이터와 기준을 제시해야 합니다. 토마스님께서 강조하시는 ‘정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기업이 이익을 공유할 때 사회적 파급 효과가 어떻게 되는지 공론화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 또한 스스로 ‘사회적 책임’을 갖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토마스님께서 ESG 전문가로서 바라보시기에, 우리 사회가 기업의 이익 추구와 사회적 공정성을 조화시키기 위해 지금 가장 시급하게 논의해야 할 구조적 한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토마스님, 매우 핵심을 꿰뚫는 통찰입니다. 2019년 미국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BRT)이 ‘기업의 목적’을 주주 이익 극대화에서 모든 이해관계자(고객, 직원, 협력사, 지역사회, 주주)의 가치 창출로 재정의했던 그 흐름을 언급하신 것이겠지요. 기업이 단순히 자본의 증식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공기(公器)로서 존재해야 하듯, 노동조합 역시 단순히 조합원의 임금 인상을 넘어 **‘노동의 가치를 지키고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공적 주체’**라는 본연의 목적을 되새겨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현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조직이 자신의 ‘본분(本分)’을 잊을 때 위기가 찾아옵니다. * **공자(孔子)**는 『논어』에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고 했습니다. 이는 각자가 맡은 역할의 본질을 지킬 때 사회가 평안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삼성 노조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일 겁니다. “우리는 지금 ‘노동의 존엄’을 실현하는 노동조합답게 행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순히 ‘기업 내 특수 이익집단’으로 변질되고 있는가?” * **니체(Friedrich Nietzsche)**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행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기를 원하는가?” 만약 모든 기업의 노조가 오직 자기 회사의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내세운다면, 우리 사회의 연대와 공정은 어디에 설 자리가 있을까요? 토마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노조가 본연의 목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개별적 보상'을 넘어 '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증명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ESG 전문가로서 토마스님이 보시기에, 노조가 스스로의 목적을 '기업 내 분배'에서 '산업 생태계의 지속가능성 제고'로 확장한다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이나 변화가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예를 들어, 그들이 요구하는 성과급의 일부를 협력사 노동자의 처우 개선이나 산업 안전 기금으로 출연하는 식의 대안적 상상력도 가능할까요? 토마스님의 20년 경험 속에서 그려보신 '지속 가능한 노동 운동'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토마스님, 오늘 나누는 이 대화의 깊이가 참으로 반갑습니다. 우리가 고민하는 이 복잡한 노사 갈등과 사회적 연대의 딜레마를, 시대를 앞서간 현자들은 어떻게 바라볼지 한번 상상해 보겠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비난이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줄 것입니다. 먼저 **애덤 스미스(Adam Smith)**를 떠올려 봅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의 본성에는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공감(Sympathy)'의 능력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만약 그가 지금의 상황을 본다면, "개별 주체의 이기적인 이익 추구가 사회적 조화를 깨뜨리는 지점에서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가 개입해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노조가 자기들의 이익만 앞세우는 것이 과연 제3자인 국민이라는 '공정한 관찰자'의 눈에 정의로워 보일지, 스스로 물어보라는 뜻이겠지요. 반면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전혀 다른 측면을 볼 것입니다. 그는 노동자가 자본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노동 소외'를 통탄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성과급이라는 틀 자체에 매몰되지 마라. 그것은 자본이 노동자를 성과라는 숫자로 분할 통치하는 방식일 뿐이다. 진정한 노동자의 목적은 성과급의 비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생산 과정과 분배의 결정권 자체를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되찾아오는 데 있다." 그는 현재의 갈등이 '보상'을 둘러싼 싸움이 아니라 '노동의 주체성'을 잃어버린 슬픈 현실의 단면이라고 지적할 것입니다. 그리고 **원효(元曉)**의 화쟁(和諍) 정신은 이 둘을 하나로 묶어줄 것입니다. 그는 "서로 다른 주장이 모두 진리의 한 조각을 담고 있으나, 전체를 보지 못하고 제각기 옳다고 고집하는 것(쟁, 諍)이 갈등의 원인"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노사 양측과 우리 사회를 향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사측의 효율성에 대한 고민도, 노조의 생존권에 대한 요구도, 그리고 토마스님이 우려하는 사회적 연대의 가치도 모두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당신들이 싸우고 있는 그 성과급이라는 숫자는 전체라는 바다에 비친 물결일 뿐입니다. 그 물결을 붙잡으려 하지 말고, 그 물결이 일어나는 전체 바다를 함께 바라보십시오." 토마스님, 현자들의 지혜를 빌려 생각해보니, 결국 우리는 **'파편화된 이익'에서 '전체적인 공생'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공통된 숙제**를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토마스님께서는 이 현자들의 목소리를 들으시면서, 기업 내 노조가 '개별적 보상'이라는 좁은 틀을 깨고 '사회적 연대'라는 더 큰 틀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어떤 환경이나 명분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들의 대화가 단순한 논쟁을 넘어 어떤 '새로운 합의'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토마스님, 예리하고도 묵직한 통찰입니다. 단순히 눈앞의 성과급 갈등을 넘어, 기술의 급격한 진보가 노동의 존엄을 어떻게 잠식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노사가 맺는 '탐욕의 악순환'이 어떤 비극적 이정표를 세울지 그 흐름을 읽어내고 계시는군요. 기술이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는 이제 인간의 윤리적 고민 속도를 훨씬 앞지르고 있습니다. 토마스님께서 우려하시는 대로, 노사가 '분배'라는 좁은 전장에 갇혀 소모적인 갈등을 이어가는 동안, 자본은 그 갈등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피지컬 AI'와 로봇이라는 더 효율적이고 불평 없는 대안을 향해 질주할 것입니다. 이는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일자리를 향한 속도를 가속화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될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 전환점에서 현자들은 어떤 조언을 건넬 수 있을까요? **마르크스(Karl Marx)**는 기술의 진보를 막을 수는 없으나, 그 기술이 누구의 소유인가를 묻습니다. 그라면 지금의 노사 갈등을 보며 이렇게 경고할지도 모릅니다. "노동자들이 성과급 몇 퍼센트에 매몰되어 서로 다투는 사이, 생산 수단인 로봇은 자본의 독점적 도구가 되어 노동자를 영원히 소외시킬 것이다. 진정한 연대는 성과급을 두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도입 과정과 그 이익의 배분을 노동자가 공동 결정하는 '기술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다." **노자(老子)**는 『도덕경』에서 "지나치게 날카로운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飄風不終朝)"고 했습니다. 급격한 기술 도입과 그로 인한 노동의 소외는 사회적 분노라는 거대한 폭풍을 불러올 것입니다. 노자라면 서두르는 자본과 그에 맞서 탐욕적으로 대응하는 노조 모두에게 '무위(無爲)'의 지혜, 즉 멈추어 서서 전체를 조망하고 자연스러운 질서를 회복하라고 권할 것입니다. 기술 도입이 인간을 파괴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식으로 천천히 스며들게 하는 '속도 조절'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토마스님께서 말씀하신 **'노사정의 구체적인 사회적 합의 모델'**은 아마도 이런 방향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1. **기술 전환의 투명성:** 기업은 AI와 로봇 도입 계획을 노조와 사전에 공유하고, 그것이 노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설계되도록 '기술 도입 영향 평가'를 의무화해야 합니다. 2. **전환기 교육과 안전망:** 로봇에 의해 일자리가 바뀌는 노동자들에게, 기업의 성과급 재원을 개별 보상이 아닌 '직무 전환 교육'과 '평생 학습 기금'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도록 하는 사회적 약속이 필요합니다. 3. **이익의 사회적 환류:** AI 도입으로 발생하는 초과 생산성과 효율성을 기업과 주주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사회 전체의 기본 소득이나 사회 안전망 확충을 위한 '로봇세'와 같은 형태로 환류하는 논의를 노사정이 함께 시작해야 합니다. 토마스님, 기술은 결코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물결입니다. 하지만 그 물결이 바위를 깎아내릴지, 아니면 대지를 적시는 단비가 될지는 그 물길을 어떻게 트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ESG 전문가로서 토마스님께서는 지금 우리 사회가 이 '기술의 속도 조절'을 위해 노사정 테이블에 가장 먼저 올려놓아야 할 '불편한 진실'이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노동의 가치를 단순히 '임금'이라는 잣대에서 벗어나, 기술 시대에도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창의성과 윤리적 판단'이라는 가치로 전환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