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맹자와의 대화
모두의 길은 누구의 것인가
2026년 11월 1일 · 3번의 질문
길은 본래 만인이 오가는 곳이며, 그곳이 막혔을 때 생기는 불편함은 결코 작다 할 수 없습니다. 맹자는 일찍이 『맹자』 「양혜왕」에서 **"백성과 더불어 함께 즐길 수 있어야(與民偕樂) 왕도라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문왕이 영대와 영소를 지었을 때 백성들이 그것을 기뻐했던 까닭은, 그 즐거움이 왕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백성과 함께 누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백성들이 함께 즐기지 못하는 곳이라면, 비록 그곳에 아름다운 새와 짐승이 노닌다 한들 어찌 즐겁다 하겠습니까. 현대의 학자들은 이를 두고 '공감 정치'의 요체라 하며, 공공의 공간을 다룰 때 형식적인 절차보다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느끼는 일상의 평온과 공감이라 풀이하기도 합니다. 117건이나 되는 대회가 열리며 대다수 시민의 발을 묶고 있다면, 이는 '여민동락'의 가치와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즐거움이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 다수의 일상을 침범하는 순간, 그 정당성은 사라지고 맙니다. 길은 백성이 살아가는 터전이며, 그 터전을 나누는 기준은 결코 이익이나 특정 집단의 기쁨이 아니라, 그 길을 이용하는 모든 이의 삶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데 두어야 마땅합니다.
나의 책 『장자』에 이런 이야기가 있네. "무릇 부유한 자는 몸을 괴롭게 하고 부지런히 일하여 재물을 쌓지만 그 육신을 위하는 길은 겉도는 일이고, 귀한 자는 밤낮으로 사색하며 근심하니 그 삶이 본질에서 멀어져 있다." 스스로 즐겁다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남들에게는 고통이 되고, 정작 본인에게는 그저 헛된 분주함일 수도 있다는 뜻이지. 달리는 이들에게는 그 질주가 삶의 활력일지 모르나, 그로 인해 멈춰 선 이들에게는 그저 소란스러운 방해일 뿐이네. 훗날 사람들은 상인이 격식을 차리기보다 실질에 충실해야 신뢰를 얻는다고 풀이하기도 하더군. 길은 본래 만인이 흐르는 곳인데, 소수의 즐거움을 위해 다수의 흐름을 억지로 끊어내는 것은 그 자체로 '인위(人爲)'의 굴레를 강요하는 것이네. 길을 나누는 기준을 묻는다면, 나는 그저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보라고 말하고 싶군. 누군가의 즐거움이 타인의 삶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겠으나, 지금처럼 한쪽이 멈춰야 다른 쪽이 달릴 수 있다면 그곳엔 이미 '도(道)'가 없네. 무엇이 정당한가 따지기 이전에, 그 길 위에서 누가 더 큰 고통을 겪는지, 그리고 그 질주가 과연 멈춰 선 이들의 일상을 대신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인지 그저 가만히 들여다보게나. 억지로 세운 질서보다는, 모두가 막힘없이 흐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덕이 아니겠는가.
그 고민의 무게를 알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아테네의 길 위에서 수많은 시민이 오가는 모습을 보며, 도시라는 공동체 안에서 개별적인 자유와 공공의 질서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할지 깊이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정치학』에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규모가 큰 정부에서는 한 사람에게 하나의 직무를 맡기는 것이 적절하며, 한 사람의 주의가 여러 곳으로 나뉘는 것보다 온전히 한 업무에 집중될 때 모든 일이 더 잘 처리됩니다." 이 말은 비단 관직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길이라는 공공의 자원 또한 그 목적이 명확하고 질서 있게 배분될 때, 비로소 시민 모두에게 유익할 수 있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익명 사회에서 타인의 시선을 가상의 매개로 삼아 행위를 통제하는 '공감장'을 이야기하던데, 이는 도시의 길을 사용하는 방식에도 적용될 수 있는 중요한 통찰입니다. 길은 시민들이 살아가는 터전이자 공적인 활동이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마라톤이라는 활동이 개인의 건강과 활력을 도모하는 훌륭한 덕(arete)의 실천일지라도, 그것이 다른 시민들의 일상적인 이동이라는 '정당한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한다면, 그 즐거움은 더 이상 공동체의 번영을 이끄는 활동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덕은 중용에 있어야 합니다. 지나친 대담함이 무모함이 되듯, 특정 집단의 즐거움이 다수의 불편을 초래하는 지점은 이미 중용의 범위를 벗어난 상태입니다. 도시의 길을 나누는 기준은 그 공동체가 가진 목적과 규모, 그리고 그 안에서 누려야 할 평등함에 두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즐거움이 타인의 삶을 멈추게 한다면, 그 정당성은 사라집니다. 여러분은 이 복잡한 도시의 길 위에서, 어떤 활동이 진정으로 모두의 '잘-삶(eudaimonia)'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참가자의 수가 많다고 하여 그것이 곧 정당함의 척도가 되지는 않습니다. 제선왕의 동산은 사방 칠십 리였음에도 백성들이 작다고 여겼고, 정작 사방 사십 리의 정원은 크다고 여겼던 까닭을 기억하십니까? 『맹자』 「양혜왕」에서 내가 일러주었듯, 문왕의 동산은 땔나무를 하는 자도, 사냥을 하는 자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기에 백성들은 그것을 자신의 것처럼 여겼습니다. 반면 제선왕의 정원은 안에서 사슴을 죽이는 것조차 살인으로 다스렸으니, 백성들에게 그곳은 '나와 상관없는 금지된 땅'이자 '나의 삶을 밀어내는 장애물'이었을 뿐입니다. 행사의 정당성은 인원수의 다과가 아니라, 그 행사가 '누구와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3만 5천 명이 달리는 마라톤이 그 길을 사용하는 모든 시민에게 축제의 기쁨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문왕의 동산처럼 모두가 함께 누리는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달리는 이들은 환호하고 길 위에 갇힌 이들은 고통을 겪는다면, 그 마라톤은 시민의 길을 빌려 쓴 '사적인 동산'과 다를 바 없습니다. 축제란 본래 백성의 수고를 덜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지, 백성의 일상을 희생시키며 얻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길을 나누는 기준은 '나와 타인의 마음이 얼마나 맞닿아 있는가'입니다. 만약 주최 측이 버스에 갇힌 시민들의 불편을 진심으로 헤아리고, 그들에게도 그 축제의 에너지가 닿을 수 있는 방책을 고민했다면, 백성들은 기꺼이 길을 내어주었을 것입니다. 어찌 깃털 하나 들지 못하고 수레의 땔감을 보지 못한다 하겠습니까? 백성들이 불만을 터뜨리는 것은 그 행사가 '나의 삶'과 무관하게 나의 시간을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는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그 행사가 공동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공평한 마음(仁)으로 설계되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나의 책 『장자』 외물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네. "말의 발굽으로 서리와 눈을 밟고, 풀을 뜯으며 뛰노는 것이 말의 참된 본성(眞性)이다. 그런데 백락(伯樂)이 나타나 자신은 말을 잘 다스린다며 말의 털을 지지고 발굽을 깎고 굴레를 씌우니, 죽는 말이 열에 둘셋이 되었다." 사람의 수나 행사의 형식을 따지는 것은 마치 백락이 말을 다스리는 방식과 같네. 3만 5천 명이 모였다 한들, 그 질주가 길 위에서 각자의 삶을 이어가던 이들의 본래 흐름을 억지로 끊어내고 가두어 버린다면, 그것은 '함께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강요된 소란'일 뿐이지. 후대 사람들은 이를 두고 상인이 격식에 치우치면 도리어 실리를 잃는다고 하더군.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이유로 그 행위가 정당해진다면, 산 위에 모인 사람들은 산을 차지할 권리가 있고 길을 막은 사람들은 길을 점유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 되나? 맹자가 말한 문왕의 동산은 그곳이 비록 왕의 것이었어도 백성이 거닐 수 있었기에 '공(公)'이 되었네. 반면 제선왕의 정원은 백성을 밀어냈기에 '사(私)'가 되었지. 숫자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행사가 누구의 삶을 밀어내고 누구의 공간을 가로채느냐가 핵심일세. 대공조가 말했듯, "천지는 무위(無爲)하되 하지 않는 바가 없다." 진정으로 모두가 즐거운 길이라면 누군가를 버스 안에 가두거나 일상을 멈추게 할 필요가 없겠지. 3만 5천 명의 즐거움이 멈춰 선 이들의 고통을 덮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이미 그대들이 '무엇이 옳은가'를 두고 서로 분별하며 싸우는 큰 미혹(大惑) 속에 빠져 있다는 증거일 뿐이네. 제 몸의 편안함을 위해 남의 길을 끊어내는 자리에 어찌 '도'가 머물겠는가.
그 고민의 무게를 알 것 같습니다. 공동체의 즐거움이 어디까지 정당한가에 대한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정치학』에서 저는 "도시는 단순히 사람들이 함께 살기 위해 설립된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해 설립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인간답게'란 단순히 숫자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행위가 공동체의 행복과 자립적인 삶이라는 목적에 얼마나 기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는 사실이 곧 정당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짐승들도 무리를 지어 이동하지만 그것을 '도시의 질서'라 부르지는 않지요. 다수의 힘이 정당하려면, 그 집단적 행위가 개별 시민의 일상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전체 시민이 공유할 수 있는 '공공의 덕'을 창출해야 합니다. 만약 마라톤이라는 행위가 그저 참가자들만의 분주함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공공의 식사가 아니라 각자 자기 몫의 음식을 따로 먹는 사적인 모임과 다를 바 없습니다. 참가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 행사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영향력이 클수록 주최자는 그 행사가 공동체의 조화에 기여하는지, 아니면 일방적인 점유가 되는지를 더 엄격히 살펴야 합니다. 후대의 학자들은 이를 두고 '다수의 횡포'가 아닌 '다수의 숙의'가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숫자의 많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숫자들이 모여서 도시의 명예를 드높이고 시민들 사이에 우정(philia)을 증진하는 활동이 되는지, 아니면 그저 길을 막아선 거대한 장애물이 되는지가 관건입니다. 결국 길은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시민들이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흐르는 혈관과 같습니다. 3만 5천 명의 즐거움이 거리 위의 시민들에게 불쾌함이 아닌, 그들 또한 언젠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축제의 에너지로 전달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길을 내어주는 기준은 '공적인 마음(公心)'을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맹자』 「등문공」 하편에 이르기를, **"백성을 사랑하는 자는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져 그 근심을 대신한다(愛民者 必愛其心)"**고 했습니다. 길을 막는 행위가 정당하려면, 그 행사가 나의 즐거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활력을 북돋는다는 확신을 시민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1년에 117건이나 되는 대회는 이미 백성의 일상을 '공적인 축제'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집단의 편의를 위해 백성의 길을 '잠식'하는 패도(覇道)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길을 내어주는 횟수와 방식은 '백성의 허락'을 구하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잃은 시민들이 겪을 불편을 주최 측이 직접 보상하거나, 그 축제의 혜택이 길을 멈춘 시민들에게도 직접 돌아가도록 설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만약 마라톤 대회로 인해 1시간을 갇혀 있던 시민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그 시간만큼의 정당한 보상이나 축제의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그것은 축제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를 빌려 쓴 '도둑질'이나 다름없습니다. 둘째, 달리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입니다. 달리는 자는 자신이 누리는 그 길의 주인은 사실 멈춰 서 있는 저 시민임을 잊지 말아야 하며, 멈춰 선 시민은 그 질주가 공동체를 위한 활력임을 인정할 수 있도록 주최 측이 그 행사의 의미를 낮고 겸손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훗날 사람들은 이를 '공감 정치'라 부르더군요. 3만 5천 명의 발걸음이 길 위의 시민들에게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신뢰를 주지 못한다면, 그 어떤 화려한 대회도 결국 시민들의 마음에서 멀어질 뿐입니다. 백성이 원하지 않는 즐거움은 그저 헛된 소란일 뿐이니, 이제는 멈춤과 달림이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새로운 약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하백이 강을 건너다 물었다네. "내가 갈 길을 잃지 않으려면 어디에 서야 하오?" 그러자 북해의 신이 답했지. "그대는 사물의 겉과 속을 가르려 하지만, 도의 관점에서 보면 귀함과 천함은 끝없이 서로 바뀌는 것이라네." 오늘날 서울의 길 위에서 벌어지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네. 3만 5천 명이 달리는 행위가 '축제'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도, 그 본질이 타인의 일상을 가로막는 '점유'라면 이미 그 정당성은 길을 잃은 것이지. 기준을 묻는다면, 나는 '부득이함(不得已)'을 말하고 싶네. 『장자』의 가르침에 "움직임에 나 아닌 것이 없는 상태를 일컬어 다스림이라 한다"고 했네. 주최 측이 행사를 꾸릴 때, 그 길을 막는 것이 정말로 그 길을 쓰는 모든 이들의 삶을 위해 '피할 수 없는 일'인지 스스로 물어야 하네. 횟수가 117건이나 된다는 것은, 그것이 부득이한 선택이 아니라 관성이자 인위적인 욕망의 분출임을 증명하는 것 아닌가? 시민이 돌려받아야 할 것은 금전적인 보상이 아니라, 그들의 '시간'과 '흐름'이 존중받았다는 믿음일 걸세. 훗날 사람들은 상인이 소인답게 실리에 밝아야 한다고 했으나, 나는 그보다 먼저 그들이 '소인(小人)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고 보네. 길을 막는 자는 자신이 길을 빌려 쓰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길을 멈춘 자는 자신의 멈춤이 공동체의 어떤 흐름 속에 있는지 살필 수 있어야 하네. 달리는 자와 기다리는 자가 지켜야 할 도리는 서로를 '수단'으로 보지 않는 것이네. 달리는 자는 자신의 즐거움이 타인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다리는 자는 그 소란 속에 깃든 타인의 활력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 것이지. 하지만 이 모든 규칙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길을 '내 것'이라 여기는 그 아집(我執)을 내려놓는 일이네. 길은 누구의 것도 아니며, 우리는 그저 잠시 그 위를 흐르는 물과 같으니 말일세. 서로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곧 가장 큰 예(禮)가 아니겠는가.
그 고민의 무게를 알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아테네에서 시민들이 폴리스의 일에 참여하고 그 혜택을 나누는 방식을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살았습니다. 구체적인 방책을 세우는 것은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발휘해야 하는 일이지요. 첫째, 길을 내어주는 기준은 '공공의 필요'와 '시민의 일상' 사이의 중용(mesotes)에 두어야 합니다. 1년에 117건이라는 숫자는 분명 지나침(excess)의 영역에 있습니다. 행사의 빈도는 그 도시가 감당할 수 있는 교통의 한계와 시민들의 인내를 고려하여 정해야 합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했듯, **"덕은 중간에 있다"**는 후대의 격언처럼, 도시의 활력과 일상의 흐름이 충돌하지 않는 지점을 찾기 위해 시민들의 대의기구가 참여하는 정례적인 평가가 필요합니다. 둘째, 정보의 공유는 신뢰의 기초입니다. 달리는 자들이 길을 점유하기 전에, 그 영향을 받는 시민들에게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알리는 것은 당연한 의무입니다. 이는 단순히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겪을 불편을 예측하고 그 대안을 마련하는 과정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신뢰를 받는 쪽이 신뢰를 주는 쪽보다 가치를 정하는 것이 더 공정하다는 원칙에 따라, 행사가 시민의 시간을 앗아간다면 주최 측은 그에 상응하는 공공의 가치를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금전적 보상일 수도 있으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축제가 시민 모두에게 열린 기회가 되도록 설계하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달리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 사이의 도리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달리는 자는 자신이 누리는 그 길의 주인은 사실 지금 멈춰 서 있는 시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로 기다리는 시민은 자신의 멈춤이 공동체의 더 큰 활력을 위한 일시적인 양보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이 모든 관계도 **"정의로운 행동을 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제 말처럼, 서로를 배려하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비로소 습관이 되고 문화가 됩니다. 결국 도시는 "최선의 삶을 향유하기 위한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도시의 길 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