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은 모두의 길을 막아도 되는가
맹자는 정치를 공평하게 하는 군자라면 행차할 때 길 가는 사람을 비키게 해도 괜찮다고 했다. 다리를 놓지 않고 제 수레로 백성을 건네준 자산을 평하며 한 말이다
사안
11월 1일 서울 도심에서 3만 5천여 명이 참가한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광화문에서 올림픽공원까지 가는 풀코스와 상암에서 여의도로 가는 10km 코스 주변 도로가 시간대별로 통제됐고, 시내버스 190개 노선이 임시로 돌아갔다. 사회관계망에는 15분이면 갈 거리를 돌아오느라 1시간 넘게 걸렸다는 글과, 버스 안에 1시간이나 갇혀 있었다는 하소연이 올라왔다. 서울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는 2024년 53건에서 올해 117건으로 늘었고, 그 가운데 대규모 도로 통제를 동반한 대회가 37건이다(KBS, 2026년 11월 1일).
이 일을 물을 만한 까닭은 양쪽이 다 정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달리기는 누구나 신청할 수 있는 건강한 즐거움이고, 큰 대회는 도시의 축제이기도 하다. 그 길로 출근하고 병원에 가고 가게 문을 여는 사람의 하루도 그만큼 정당하다. 한 번의 대회라면 하루 참으면 된다. 그러나 올해 들어 117건이라는 숫자는 이 일을 하루의 불편에서 길의 규칙으로 바꿔 놓는다. 물음은 둘로 갈린다. 모두가 함께 쓰는 길을 어떤 이들의 즐거움을 위해 막아도 된다면 그 정당성은 어디서 오는가. 그리고 그 길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나누어 써야 하는가.
세 현자에게 물었더니
이 물음을 지혜의 원탁에 올렸다. 맹자가 방장을 맡고 장자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앉았으며, 문답은 세 차례 오갔다. 첫 물음에 셋은 거의 같은 답을 냈다. 원탁의 맹자(AI)는 「양혜왕」의 여민해락(與民偕樂), 곧 백성과 더불어 즐긴다는 말을 근거로, 즐거움이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 다수의 일상을 침범하는 순간 정당성이 사라진다고 했다. 원탁의 장자(AI)는 소수의 즐거움을 위해 다수의 흐름을 억지로 끊는 것을 인위(人爲)의 굴레라 했고, 원탁의 아리스토텔레스(AI)는 특정 집단의 즐거움이 다수의 불편을 낳는 지점은 이미 중용을 벗어났다고 했다. 질문자가 반대편에 서서, 3만 5천 명이 참가하고 누구나 신청할 수 있는 행사라도 안 되느냐고 묻자 셋은 다시 한목소리로 답했다. 문제는 사람의 수보다 함께 누리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맹자(AI)는 문왕의 동산과 제선왕의 동산을, 장자(AI)는 백락이 말을 길들이는 이야기를, 아리스토텔레스(AI)는 도시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세워졌다는 『정치학』의 문장을 끌어왔다. 마지막 문답에서 맹자(AI)는 시민의 허락을 구하는 절차를, 아리스토텔레스(AI)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미리 알리는 의무를 말했고, 셋 다 서로의 처지를 헤아리라고 했다. 보상에서는 갈렸다. 막힌 시민에게 그 시간만큼 보상하라고 한 것은 맹자(AI)였다. 장자(AI)는 시민이 돌려받을 것은 "금전적인 보상이 아니라" 시간과 흐름이 존중받았다는 믿음이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AI)는 금전적 보상일 수도 있으나 축제를 시민 모두에게 열린 기회로 설계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원전을 열면 이 합의는 그대로 서지 않는다. 실제의 맹자는 임금이 음악과 사냥과 동산을 즐기는 것을 말리지 않았고, 정치를 공평하게 하는 군자라면 행차할 때 길 가는 사람들을 비키게 해도 괜찮다고까지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사와 모임과 공공 연회를 도시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보았다. 『장자』는 무리 지어 달려가며 즐겁다고 말하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판정을 보류했다. 그 너그러움에는 조건이 붙어 있다. 맹자가 길을 비키게 해도 괜찮다고 한 것은, 다리를 놓지 않고 제 수레로 사람들을 건네준 자산을 평하는 자리에서였다. 그는 그 친절을 "은혜롭지만 정치를 할 줄 모르는" 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럿이 함께 가진 것이 가장 덜 돌봐진다고 경고했다. 『장자』 「칙양」에서 공(公)은 다수의 것도 소수의 것도 아니고, 서로 다른 것들을 어느 하나에 치우침 없이 아우른 상태였다. 그래서 원전에서 끌어낼 물음은 길을 막아도 되느냐보다 한 걸음 앞에 있다. 길을 막기 전에, 막힌 사람이 건널 다리를 놓았는가.
"다리를 놓았는가" — 맹자
원탁의 맹자(AI)가 근거로 삼은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말은 『맹자』 첫 편 「양혜왕」에 거듭 나온다. 그 장들을 함께 읽으면 맹자는 임금의 즐거움을 줄이라고 한 사람이 아니다. 「양혜왕 하」 1장에서 제나라 왕이 자신은 옛 성왕의 음악이 아니라 세속의 음악을 좋아할 뿐이라며 안색을 바꾸자, 맹자는 왕이 음악을 몹시 좋아한다면 제나라는 거의 다스려질 것이고 지금 음악도 옛 음악과 같다고 했다. 그러고는 물었다. 혼자 즐기는 것과 남과 함께 즐기는 것, 적은 사람과 즐기는 것과 많은 사람과 즐기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즐거운가. 왕은 남과 함께, 많은 사람과 함께가 낫다고 답했다.
그다음이 이 장의 핵심이다. 같은 종소리와 북소리, 같은 수레 소리와 깃발을 두고 백성은 두 가지로 반응한다. 한쪽은 머리를 아파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우리 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시는데, 어찌하여 우리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는가? 부자(父子)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형제와 처자식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말한다. 다른 쪽은 기뻐하며 "우리 왕께서 병이 없으신가? 어찌하여 음악을 연주하실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맹자는 그 차이를 한 가지로 설명했다.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백성과 함께 즐기기 때문입니다." 음악이 달랐던 것이 아니다. 백성의 삶이 그 소리를 견딜 만한 상태에 있느냐가 달랐다. 주희는 『맹자집주』에서 이 대목을 그렇게 풀었다. 백성과 함께 즐기지 않는다는 것은 "홀로 제 몸만 즐기고 그 백성을 휼(恤)하지 않아 그들을 궁핍하고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고, 함께 즐긴다는 것은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을 미루어 인정(仁政)을 행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각각 그 살 곳을 얻게 하는 것"이다(두 인용 모두 필자 다듬음 — 띄어쓰기·어미·한자 병기).
주해 1 · 「백성과 함께 즐긴다」의 장들(「양혜왕 하」 1·4장 · 「양혜왕 상」 2장 · 주희 집주)
- 풀이'함께 즐김'은 두 꼴로 나온다. 「양혜왕 상」 2장은 與民偕樂(더불어 함께 즐김), 「양혜왕 하」 1장은 與民同樂(같이 즐김)이다. 상 2장에서 문왕은 "백성(民)의 힘으로" 대(臺)와 소(沼)를 만들었는데도 백성이 기뻐했다. 함께 즐긴다는 것이 백성에게 아무 부담도 지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 1장에서 백성의 반응을 가른 것은 음악의 종류가 아니라 "부자(父子)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형제와 처자식은 뿔뿔이 흩어졌다"는 삶의 형편이었다.
- 후대 해석(주희 『맹자집주』)상 2장 주: "맹자는 문왕이 비록 백성의 힘을 썼으나 백성들이 도리어 이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이미 아름다운 이름을 더해주고 또 그 소유한 바를 즐거워했음을 말한 것입니다. 대개 문왕이 능히 그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즐거움을 즐거워하였고, 문왕 또한 그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孟子言文王雖用民力,而民反歡樂之……蓋由文王能愛其民,故民樂其樂,而文王亦得以享其樂也)." 하 1장 주: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은 홀로 제 몸만 즐기고 그 백성을 휼(恤)하지 않아 그들을 궁핍하고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다(不與民同樂,謂獨樂其身而不恤其民,使之窮困也)"(필자 다듬음 — 띄어쓰기·어미) ·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한다는 것은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을 미루어 인정을 행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각각 그 살 곳을 얻게 하는 것이다(與民同樂者,推好樂之心以行仁政,使民各得其所也)." 하 4장 주는 이 장이 "임금이 마땅히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얻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해야 함을 밝힌 것이지, 단지 현자와 함께해야 할 뿐임을 말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明人君當與民同樂,不可使人有不得者,非但當與賢者共之而已也).
- 오늘에 비추어빗대어 읽으면, 주희의 "얻지 못하는 자가 없게"는 대회 날 길 위의 모든 사람을 응원석에 앉히라는 말이 아니라, 그날 제 갈 곳에 가야 하는 사람 가운데 길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말에 가깝다.
- 휴담 도서관에서 읽기하 1장 p0058 · p0059 · p0060 · p0061 · 상 2장 p0004 · 하 4장 p0073 · 주희 집주는 도서관 미수록(원천 대조)
여기서 맹자의 기준이 드러난다. 원탁의 맹자(AI)는 두 번째 대답에서 마라톤이 "그 길을 사용하는 모든 시민에게 축제의 기쁨으로 다가온다면" 문왕의 동산처럼 될 것이라 했다. 그러나 원전은 막힌 사람이 달리는 사람과 같이 기뻐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요구하는 것은 그날 그 사람이 제 갈 곳에 닿을 수 있느냐다. 백성이 미간을 찌푸린 까닭은 아비와 자식이 만나지 못할 만큼 제 삶이 끊겨 있었다는 데 있었다. 빗대어 읽으면, 응원 소리가 울리는 같은 일요일 아침에 어떤 시민은 웃으며 지나가고 어떤 시민은 미간을 찌푸린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대회가 얼마나 흥겨운가보다 그 시민이 병원에, 일터에, 가족에게 제때 닿았느냐다.
「양혜왕 하」 2장은 같은 기준을 공간으로 보여 준다. 사방 칠십 리는 문왕의 동산이고 백성은 그것을 오히려 작다고 여겼다. 사방 사십 리는 제선왕의 동산이고 백성은 그것을 크다고 여겼다. 까닭은 넓이가 아니었다. 문왕의 동산에는 꼴 베고 땔감 줍는 사람이 드나들고 꿩과 토끼를 잡는 사람이 드나들었다. "백성들과 함께 사용했으니, 백성들이 작다고 여긴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제선왕의 동산에서는 사슴을 죽인 자를 사람을 죽인 죄와 같이 다스렸고, 맹자는 그것을 "나라 안에 설치된 함정"이라 불렀다. 그는 제선왕의 동산을 말하기 앞에 한 문장을 끼워 두었다. 자신은 처음 제나라 국경에 이르러 "나라의 큰 금지 사항이 무엇인지 물어본 후에야 감히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금지는 들어오기 전에 물어서 알 수 있어야 하고, 안에 든 사람이 모르고 걸려들면 함정이 된다. 주희는 여기에 옛 제도를 덧붙였다. 옛날의 사냥은 모두 농한기에 했고, 농작물을 심고 거두는 밭 가운데서 말을 달리지 않으려고 한가하고 넓은 땅을 헤아려 동산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주해 2 · 문왕의 동산과 나라 안의 함정(「양혜왕 하」 2장 · 주희 집주)
- 배경제선왕이 문왕의 동산이 사방 칠십 리였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묻고, 자기 동산은 사방 사십 리인데 백성이 오히려 크다고 여기는 까닭을 묻자 맹자가 답한 장이다.
- 후대 해석(주희 『맹자집주』)"옛날에는 사시의 사냥을 모두 농한기에 군사 일을 훈련하기 위해 하였으나, 농작물을 심고 거두는 마당과 채소밭 가운데서 말을 달리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한가하고 넓은 땅을 헤아려 동산으로 삼았다(古者四時之田,皆於農隙以講武事,然不欲馳騖於稼穡場圃之中,故度閒曠之地以為囿)." 주희는 같은 주에서 "문왕의 70리 동산은 역시 천하를 삼분하여 그 둘을 소유한 뒤의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덧붙여, 칠십 리라는 넓이도 나라의 크기에 견주어 읽었다. 또 "예기에 나라에 들어갈 때는 금령을 묻는다고 하였다(禮:入國而問禁)"고 맹자의 행동이 예법이었음을 밝히고, 함정(阱)을 "땅을 파서 짐승을 빠뜨리는 구덩이이니, 백성을 죽을 구덩이에 빠뜨림을 말한다(坎地以陷獸者,言陷民於死也)"고 풀었다.
- 풀이동산의 크고 작음을 가른 것은 넓이가 아니라 쓰임이다. 칠십 리 안에서 꼴과 땔감과 사냥이라는 백성의 생업이 이어졌고, 사십 리 안에서는 생업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되었다. 주희의 풀이대로 함정(阱)은 그 가혹한 금령이 동산을 백성을 죽음에 빠뜨리는 구덩이로 만든 것이다. 국경에서 금령을 물은 것은 손님인 맹자 자신이었고, 주희는 그것을 「入國而問禁」의 예법으로 풀었다. 나라가 알려 줄 의무를 말한 대목은 아니다.
- 오늘에 비추어빗대어 읽으면, 통제 구역이 넓어도 그 안팎으로 사람들의 볼일이 이어지면 작게 느껴지고, 좁아도 안에 든 사람의 볼일이 끊기면 크게 느껴진다. 묻는 쪽과 알리는 쪽을 바꾸어 읽는 것(본문 결론 둘째)은 원전이 아니라 주해자의 확장이다.
- 휴담 도서관에서 읽기하 2장 p0067 · 주희 집주는 도서관 미수록(원천 대조)
그러니 맹자에게 즐거움의 자리가 크냐 작으냐는 넓이로 재지 않는다. 언제 여느냐(농한기), 어디에 여느냐(밭이 아닌 빈 땅), 그 안에서 백성의 일상이 이어지느냐(꼴 베는 이가 드나듦), 금령이 백성의 생업을 죄로 만들지 않느냐(함정)로 잰다. 주해자의 생각으로는, 오늘은 묻는 쪽과 알리는 쪽이 바뀌어야 한다. 옛 손님은 국경에서 스스로 물었지만, 버스에 오른 시민에게는 물을 곳이 없다. 빗대어 읽으면, 같은 거리를 막아도 우회로와 건널 곳이 열려 있고 통제를 버스에 오르기 전에 알 수 있는 대회는 시민에게 작게 느껴진다. 승객이 버스 안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한 시간을 보내는 대회는 몇 킬로미터를 막았든 크게 느껴진다.
가장 날카로운 대목은 「이루 하」 2장이다. 정나라의 정치를 맡은 대부 자산(子產)은 백성이 맨발로 강을 건너는 것을 보고 자기 수레에 태워 건네주었다. 맹자는 이렇게 평했다. "은혜롭지만 정치를 할 줄 모르는구나." 해마다 11월에 사람이 건너는 다리를, 12월에 수레가 건너는 다리를 놓으면(주희에 따르면 주나라 달력의 11·12월로, 하나라 달력으로는 9·10월이다) 백성은 물 건너는 일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군자(君子)가 정치를 공평하게 하면, 길을 갈 때 사람들을 피하게 하는 것도 괜찮다. 어찌 모든 사람을 일일이 건네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정치를 하는 자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한다면, 하루 종일 해도 부족할 것이다." 주희는 은혜(惠)를 "사사로운 은혜와 작은 이익"으로, 정치(政)를 "공평하고 정대(正大)한 체통이 있으며, 기강과 법도를 베푸는 것"으로 풀었다. 다리를 그 달에 놓는 까닭도 적었다. 농사일이 끝나 백성의 힘을 쓸 수 있고, 날이 곧 추워져 맨발로 건너기 어려워지는 때이기 때문이다. 공평한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면 행차할 때 길 가는 사람을 물리쳐 자신을 피하게 하더라도 "과하지 않다"고 했고, 끝에 제갈량의 말을 붙였다. "세상을 다스림은 큰 덕으로써 해야지, 작은 은혜로써 해서는 안 된다."
주해 3 · 자산의 수레와 겨울 전의 다리(「이루 하」 2장 · 주희 집주)
- 풀이惠(은혜)와 政(정치)의 구분이 이 장의 뼈대다. 은혜는 눈앞의 한 사람을 건네주고, 정치는 건너야 할 모든 사람이 건널 수 있게 한다. "行辟人"은 행차할 때 길 가는 사람을 비키게 한다는 말이다.
- 배경자산은 정나라 대부 공손교(公孫僑)다(주희). 진수와 위수는 정나라의 두 강이다.
- 달주희는 「周十一月,夏九月也。周十二月,夏十月也」라 했다. 주나라 달력의 11·12월은 하나라 달력으로 9·10월이다. 오늘의 양력 11·12월로 읽지 않는다.
- 후대 해석(주희 『맹자집주』)"혜(惠)는 사사로운 은혜와 작은 이익을 말합니다. 정(政)은 공평하고 정대(正大)한 체통이 있으며, 기강과 법도를 베푸는 것입니다(惠,謂私恩小利。政,則有公平正大之體,綱紀法度之施焉)." 다리를 놓는 달에 대해서는 "대개 농사일이 이미 끝나 백성의 힘을 쓸 수 있고, 또 날씨가 장차 추워지고 얼어붙을 때이므로 물에 교량이 있으면 백성들이 맨발로 건너는 것을 걱정하지 않게 되니, 이 또한 왕정(王政)의 한 가지 일입니다(蓋農功已畢,可用民力,又時將寒冱,水有橋樑,則民不患於徒涉,亦王政之一事也)." 行辟人에 대해서는 "정치를 공평하게 할 수 있다면 행차할 때 길 가는 사람들을 물리쳐 자신을 피하게 하더라도 과하지 않다는 말입니다(言能平其政,則出行之際,辟除行人,使之避己,亦不為過)." 끝으로 "사람마다 모두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어 그 마음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면, 사람은 많고 날은 짧아 역시 쓰기에 부족할 것임을 말합니다. 제갈무후(諸葛武侯)가 일찍이 '세상을 다스림은 큰 덕으로써 해야지, 작은 은혜로써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맹자의 뜻을 얻은 것입니다(諸葛武侯嘗言,「治世以大德,不以小惠」,得孟子之意矣)."
- 걷어 낼 것비키게 하는 사람은 관직에 있는 군자이고, 비키는 사람은 백성이다. 본문에서 말했듯 그 신분의 위계는 오늘의 길에 그대로 대지 않는다.
- 허락의 범위주희의 풀이는 「出行之際」, 곧 행차하는 동안이다. 다스리는 사람이 지나가는 짧은 때의 일이고, 남이 여는 행사나 긴 구간 통제를 두고 한 말은 아니다.
- 오늘에 비추어주해자의 생각으로는, 이 장이 오늘에 빗대어 남기는 것은 길을 막는 사람의 특권보다 길을 막기 전의 순서다. 건널 사람이 많을 것을 미리 알고, 그들이 다 건널 수 있게 해 둔 다음에야 비키게 하는 일이 과하지 않다.
- 휴담 도서관에서 읽기「이루 하」 2장 p0040 · 주희 집주는 도서관 미수록(원천 대조)
이 장은 원탁의 처방을 다시 보게 한다. 원탁의 맹자(AI)는 첫 대답에서 "즐거움이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 다수의 일상을 침범하는 순간, 그 정당성은 사라지고 맙니다"라고 했다. 원전의 맹자는 공평하게 다스리는 군자가 행차하는 동안 길 가는 사람을 비키게 하는 일을 정당성의 상실로 보지 않았다. 또 원탁의 맹자(AI)는 마지막 대답에서 한 시간을 갇혀 있던 시민에게 "그 시간만큼의 정당한 보상"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이 장에서 맹자는 보상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주희의 구분을 빌리면 갈래를 나눌 수 있다. 다스리는 사람이 그때그때 한 사람씩 챙겨 주는 것은 사사로운 은혜와 작은 이익(惠) 쪽이고, 기강과 법도로 미리 정해 누구에게나 같게 적용하는 것은 정치(政) 쪽이다. 주해자의 생각으로는, 막힌 시민에 대한 보상도 규칙으로 정해 두면 법도에 들고, 그날그날의 선처로 남으면 자산의 수레에 가까워진다. 맹자가 정치라 부른 것의 한가운데에는 다리가 있다. 강을 건너야 할 사람이 많다는 것을 미리 알고, 그들이 다 건널 수 있는 다리를 알맞은 달에 놓는 일이다.
후대의 해석은 이 말이 옛날에만 해당한다는 생각을 일찍 막아 두었다. 주희가 「양혜왕 하」 1장에 끌어온 범씨(范氏)는, 전국시대에 백성은 궁핍한데 임금들이 홀로 남면하는 즐거움으로 제 몸을 받들었다고 그 시대를 적었다. 그리고 맹자가 지금 음악이 옛 음악과 같다고 한 것은 백성을 구하려는 급한 마음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 실제로는 지금 음악과 옛 음악을 같이 볼 수 없지만 "다만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한다는 뜻에는 고금의 차이가 없을 뿐"이라는 것이다. 즐거움의 형식은 바뀌어도 그것을 백성의 살 곳과 나란히 놓는 원리는 시대를 타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걷어 낼 것도 있다. 맹자의 이야기에서 길을 비키게 하는 사람은 군자, 곧 관직에 있는 사람이고 비키는 사람은 백성이다. 행차의 특권은 신분의 위계 위에 서 있다. 허락의 범위도 좁다. 주희의 풀이대로 "행차할 때" 길 가는 사람들을 물리쳐 자신을 피하게 하는 것, 다스리는 사람이 지나가는 동안의 일이다. 남이 즐기려고 여는 행사나 반나절에 걸친 구간 통제를 두고 한 말은 아니고, 오늘의 마라톤 참가자는 군자도 임금도 아니다. 그러니 이 장을 대회 통제의 허가로 읽을 수는 없다. 빗대어 읽을 수 있는 것은 순서다. 주해자의 생각으로는, 길을 잠시 비우는 일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는 비우는 그날의 사정보다 평소의 다스림이 공평한가에 달려 있고, 그 공평함을 가장 쉽게 확인하는 길은 막힌 사람이 건널 다리가 이미 놓였는지 보는 것이다. 맹자의 문장에서도 다리가 먼저 나오고, 비키게 하는 것은 그 뒤에 나온다.
서로 다른 것을 아울러 공(公)을 이룬다 — 장자
원탁의 장자(AI)는 세 대답 내내 달리는 사람들에게 박했다. 질주는 멈춰 선 이들에게 "소란스러운 방해"일 뿐이고, 117건이라는 횟수는 "관성이자 인위적인 욕망의 분출"이라고 했다. 그가 첫 대답에서 끌어온 「지락」의 문장, 부유한 자는 몸을 괴롭히며 재물을 쌓지만 다 쓰지도 못하니 제 몸을 위한다는 것이 도리어 몸 밖의 일에 매인 것이라는 말은 『장자』에 실제로 있다. 그러나 그 말은 남에게 고통을 주는 즐거움을 겨냥하지 않는다. 부와 귀와 장수를 좇다 제 몸을 해치는 사람 자신을 안타까워하는 말이다.
같은 「지락」의 바로 다음 대목은 오히려 오늘의 풍경에 가깝다. 『장자』는 세상 사람들이 즐긴다는 것을 이렇게 그렸다. "모두가 무리 지어 달려가며 마치 그만둘 수 없다는 듯 안달복달하면서도 다들 즐겁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판정은 내리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즐겁다고도 즐겁지 않다고도 여기지 않는다." 이 편이 참된 즐거움이라 부른 것은 무위(無爲)였고, 그것이 "도리어 세속이 크게 괴로워하는 바"라는 것도 알았다. 이 보류를 동의로 읽어서는 안 된다. 「안달복달」이라는 묘사에 이미 의심이 묻어 있고, 이 편은 참된 즐거움을 다른 곳에 두었다. 다만 남의 즐거움을 가짜라고 단정하는 자리에도 서지 않았다. 원탁의 장자(AI)처럼 달리는 사람들의 즐거움을 소란이라 잘라 부르는 것은 그 보류를 건너뛴 말이다. 『장자』가 거듭 의심하는 것은 무엇이 옳은가를 저마다의 자리에서 단정하는 마음이다.
주해 4 · 무리 지어 달려가는 즐거움(「지락」)
- 풀이「지락(至樂)」은 '지극한 즐거움'이라는 편 이름 그대로, 세상이 즐거움이라 부르는 부·귀·장수·명성이 과연 즐거움인지 묻는 편이다. 첫 대목의 과녁은 제 몸을 해치며 그것을 좇는 사람 자신이다. 둘째 대목의 "舉羣趣者"는 글자대로 '무리 지어 달려가는 것'이다. 이 편이 마라톤을 안 것은 물론 아니다. 그린 것은 세속의 즐거움 일반이고, 그 앞에서 즐겁다는 판정도 즐겁지 않다는 판정도 보류했다.
- 휴담 지식 노트에서「장자 — 무위(無爲), 원전에서」는 무위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고 짚는다. 같은 편 다음 대목은 "천지는 무위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맺는다. 「지락」의 무위를 근거로 「그러니 달리지 말라」고 끌어내는 것은 원전의 결을 거스른다.
- 편에 대하여이 글이 쓴 편 가운데 「제물론」은 내편, 「마제」·「추수」·「지락」·「산목」은 외편, 「경상초」·「칙양」은 잡편이다. 외편·잡편에는 장자 후학의 글이 섞였다고 널리 본다. 그래서 이 글은 외편·잡편의 말을 「『장자』」나 편 이름(「지락」·「칙양」 등)으로 쓰고, 장자 본인의 말로 단정하지 않는다. 내편 「제물론」만 장자의 말로 썼다.
- 휴담 도서관에서 읽기「지락」 p0003 · p0004 · p0005
그 마음을 다룬 곳이 「추수」다. 강의 신 하백이 바다의 신 북해약에게 귀함과 천함의 경계를 어디서 짓느냐고 묻자 북해약은 답한다. "도(道)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에는 귀함도 천함도 없소. 사물 자체의 관점에서 보면 저마다 자기를 귀하다 하고 서로를 천하다 하오." 길 위의 두 무리가 꼭 그렇다. 달리는 사람에게 그날의 길은 한 해를 준비한 무대이고 버스는 잠깐 비켜야 할 것이다. 버스 안의 사람에게 길은 일상의 통로이고 달리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로챈 무리다. 저마다 자기를 귀하게 보고 상대를 천하게 본다. 원탁의 장자(AI)가 마지막 대답에서 하백의 문답을 꺼낸 것은 그 점에서 원전에 닿아 있다.
『장자』에서 공(公)을 풀어 보이는 곳은 「칙양」이고, 말하는 사람은 대공조(大公調)다. 소지(少知)가 대공조에게 '구리(丘里)의 말', 곧 마을 사람들의 공론이 무엇이냐고 묻자 대공조는 답한다. 구리란 "열 성씨, 백 사람의 이름을 합쳐 풍속을 이룬 것이니, 서로 다른 것을 합쳐 같음으로 삼고, 같음을 흩어 다름으로 삼는 것이다." 언덕과 산은 낮은 흙이 쌓여 높아지고 강과 바다는 물이 모여 커지며, "대인(大人)은 뭇사람을 아울러 공정함(公)을 이룬다." 비유가 이어진다. "사계절은 기운이 제각각 다르지만 하늘이 어느 하나에 치우쳐 베풀지 않으므로 한 해가 이루어지고, 다섯 관직은 직분이 제각각 다르지만 임금이 사사로이 하지 않으므로 나라가 다스려진다."
주해 5 · 구리(丘里)의 말 — 공은 다른 것을 합쳐 이룬다(「칙양」)
- 풀이구리(丘里)는 마을이다. 「칙양」의 대공조(大公調)는 마을의 공론을 여러 성씨와 이름이 합쳐진 것으로 보고, 공(公)을 "뭇사람을 아울러(合并)" 이룬 것이라 했다. 공은 한 무리의 뜻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다름을 지닌 채 모인 상태다. "天不賜"는 하늘이 어느 한 계절에만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는 말이고, 그래서 서로 다른 기운의 네 계절이 한 해를 이룬다.
- 끝 구절인용한 대목 끝의 "无為而无不為"는 대공조가 도(道)를 두고 한 말이다. 「지락」에서는 같은 꼴의 말이 천지를 두고 나온다(주해 4).
- 오늘에 비추어빗대어 읽으면, 길의 공공성은 그 길을 쓰는 사람의 수에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쓰임이 한 해를 이루듯 차례를 얻는 데서 나온다. 이 대목은 마을의 공론과 도의 무사(無私)를 말한 것이고, 길을 말한 것은 아니다.
- 휴담 도서관에서 읽기「칙양」 p0016
이 대목에서 공은 다수결이 아니다. 3만 5천 명이 많으니 공이라는 생각도, 길을 쓰는 사람이 더 많으니 공이라는 생각도 「칙양」의 공과는 거리가 있다. 이 편의 공은 서로 다른 쓰임이 한데 모이되 어느 하나도 다른 것을 지우지 않는 상태이고, 사계절처럼 차례로 오되 하늘이 한 계절만 편들지 않는 상태다. 빗대어 읽으면, 도시의 길에는 출근과 장보기와 구급차와 배달과 산책과 달리기가 서로 다른 계절처럼 들어 있다. 어느 아침을 달리기에 내주는 것은 한 계절이 돌아오는 일과 같아서 그 자체로 사사로움이 아니다. 사사로움은 같은 길, 같은 요일 같은 시간대가 거듭 한 쓰임에만 주어져 다른 쓰임의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 때 생긴다. 주해자의 생각으로는, 117이라는 숫자 자체보다 그 117번이 어느 길, 어느 아침에 몰렸는지가 「칙양」의 물음에 더 가깝다.
몇 번이 적당한지, 누가 정하는지에 대해서는 『장자』가 말이 없다. 제도를 설계하는 책이 아니다. 대신 한 가지를 더 일러 준다. 「제물론」의 원숭이 이야기다.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도토리를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고, 아침에 넷, 저녁에 셋으로 바꾸자 모두 기뻐했다. "이름과 실질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기쁨과 노여움이 일었으니, 이 또한 자연의 옳음을 따른 셈이다." 이야기는 원숭이를 비웃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기르는 사람은 원숭이들이 옳다 하는 쪽을 따라 주었고, 글은 이렇게 맺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시비를 조화시켜 하늘의 고름(天均)에 머무니, 이를 일러 양행(兩行, 양쪽을 다 살림)이라 한다." 이 이야기를 오늘에 대려면 조심해야 한다. 원숭이들의 노여움은 실질이 그대로인데 일어난 것이었다. 버스 안 시민의 노여움에는 제때 닿느냐는 실질이 걸려 있다. 그래서 빗대어 읽을 수 있는 것은 양행 쪽이다. 우회로와 알림과 시간대를 고치는 일은 이름만 바꾸는 조삼모사와 달리 시민이 제때 닿느냐는 실질을 바꾼다. 그 실질을 고쳐 양쪽이 다 가게 하는 것이 주해자가 읽은 양행이다.
주해 6 · 조삼모사와 양행(「제물론」), 귀함과 천함(「추수」)
- 풀이「제물론」의 원숭이 이야기는 흔히 어리석음의 비유로만 쓰이지만, 장자는 원숭이 기르는 사람(狙公)이 그 노여움을 따라 배치를 바꾼 것을 "因是", 곧 그때그때의 옳음을 따른 것으로 놓고, 성인이 옳고 그름의 다툼을 조화시켜 양쪽을 다 가게 하는 양행(兩行)으로 이었다. 기르는 사람이 원숭이들의 뜻을 따라 주었다는 풀이는 이 "因是"를 읽은 주해자의 풀이다.
- 조심할 곳같은 단락의 "道行之而成(길은 사람이 다녀서 이루어진다)"은 이름과 판단이 쓰임 속에서 생긴다는 말로, 도로를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이 글은 그 구절을 길의 소유를 따지는 근거로 쓰지 않았다.
- 조삼모사를 대는 곳원숭이의 노여움은 「名實未虧」, 실질이 그대로인데 일어난 것이다. 막힌 시민의 노여움에는 제때 닿느냐는 실질이 걸려 있어서, 이 이야기를 「배치만 바꾸면 노여움이 줄어든다」로 대면 시민의 노여움을 실질 없는 것으로 비치게 한다. 본문은 양행만 빗대어 읽었다.
- 이어지는 문답「추수」에서 하백은 귀천의 경계를 물은 뒤, 그렇다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느냐고 다시 묻는다. 북해약은 "以道觀之,何貴何賤,是謂反衍(도(道)의 관점에서 보면,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천하겠소? 이를 일러 반연(反衍, 끝없이 서로 바뀜)이라 하오)"이라고 답한다.
- 휴담 도서관에서 읽기「제물론」 p0004 · 「추수」 p0006 · p0008
원탁의 장자(AI)는 마지막에 '부득이함(不得已)'을 기준으로 내놓았다. 길을 막는 것이 정말 피할 수 없는 일인지 스스로 물으라는 것이다. 이 말은 『장자』에 근거가 있다. 「경상초」는 "부득이함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덕이라" 하고, "마땅한 행함이 필요할 때에는 부득이함에 말미암아 행하라"고 한다. 다만 「경상초」의 부득이함은 남을 심사하는 잣대이기 전에 스스로를 다잡는 태도다. 이 점은 기다리는 사람의 도리에도 닿는다. 「산목」에서 시남자(市南子)는 나란히 묶은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와 부딪히면 성마른 사람도 화내지 않지만, 그 배에 한 사람이라도 타고 있으면 소리치고 끝내 험한 말을 한다고 했다.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탄 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덧붙였다. "사람이 자기를 비워 세상에 노닐 수 있다면, 그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버스 안의 노여움은 창밖을 달리는 사람에게 향하기 쉽다. 그러나 통제를 정한 것은 창밖의 참가자가 아니다. 빗대어 읽으면, 「산목」의 빈 배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노여움의 과녁을 다시 보라고 한다. 이 가르침을 남에게 "참으라"고 요구하는 데 쓰면 「산목」을 거꾸로 쓰는 것이다. 빈 배는 자기에게 하는 말이고, 다리를 놓는 일은 여전히 맹자가 말한 다스리는 자의 몫이다.
주해 7 · 부득이함과 빈 배(「경상초」 · 「산목」)
- 풀이「경상초」의 부득이(不得已)는 억지로 꾀해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형편에 응해 움직인다는 뜻이다. 원탁의 장자(AI)가 이를 "그 길을 막는 것이 정말로 그 길을 쓰는 모든 이들의 삶을 위해 '피할 수 없는 일'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는 기준으로 쓴 것은 원전의 결에 맞는다. 부득이함은 같은 문장의 앞 절(動以不得已之謂德)에 있고, 뒤 절(動无非我之謂治)은 다스림을 말한다.
- 배경빈 배 이야기는 시남자(市南子)가 근심 많은 노나라 임금에게 욕심을 덜고 자기를 비우라고 권하는 말 끝에 나온다. 남의 노여움을 다스리는 법이 아니라, 자기를 비운 사람은 해침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오늘에 비추어주해자의 생각으로는, 빈 배는 버스 안의 사람이 자기 마음에 쓸 수 있는 말이지, 길을 막은 쪽이 시민에게 할 말은 아니다. 통제를 정한 쪽이 이 말로 시민의 노여움을 달래려 한다면 그것은 맹자가 말한 다리를 건너뛰는 일이다.
- 휴담 도서관에서 읽기「경상초」 p0036 · p0039 · 「산목」 p0011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것은 가장 적게 돌본다" — 아리스토텔레스
원탁의 아리스토텔레스(AI)가 마지막 대답에서 내린 "1년에 117건이라는 숫자는 분명 지나침(excess)의 영역에 있습니다"라는 판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과는 결이 다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 6장에서 그는 사물 자체의 중간과 "우리와 관련된" 중간을 나누고, 뒤의 것은 "특정 개인에게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하나이거나 동일하지 않다"고 했다. 덕의 중용은 미리 정해진 숫자가 아니라 그 처지에 맞는 정도다. 117이 많은지 숫자만으로 판정하지 않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그가 이 사안에 실제로 보탤 것은 셋이다. 첫째, 그는 축제를 도시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놓았다. 원탁의 아리스토텔레스(AI)가 두 번째 대답에서 인용한 "도시는 단순히 사람들이 함께 살기 위해 설립된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해 설립되었다"는 『정치학』 3권 9장에 있는 문장이다. 같은 단락에는 이런 말도 있다. 도시가 가능한 한 행복하고 자립적인 삶을 누리려면 사람들이 한곳에 살며 서로 통혼해야 하고, "그래서 모든 도시에는 우정을 증진하기 위한 가족 모임, 클럽, 제사, 공공 연회가 있다. 사교에 대한 사랑 자체가 우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가 설립된 목적은 주민들이 행복하게 살기 위함이며, 이러한 것들은 그 목적에 기여한다." 이 장의 논지는 도시가 장소나 안전이나 교역의 공동체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고, 제사와 연회는 행복한 삶이라는 목적에 이바지하는 자리에 놓인다. 그에게 시민이 함께 모여 즐기는 일은 길을 쓰는 데 끼어드는 군더더기로 보이지 않았다. 원탁의 셋이 세운 '소수의 즐거움 대 다수의 일상'이라는 구도는 그에게는 처음부터 잘 맞지 않는다.
둘째, 그는 그 즐거움의 모임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정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8권 9장에서 그는 배의 선원, 전쟁의 동료, 같은 부족 같은 공동체들이 저마다 특정한 이익을 목표로 하고, 어떤 공동체는 제사나 친목처럼 즐거움을 위해 생긴다고 했다. 그리고 그 모두가 "거대한 사회적 공동체", 곧 정치 공동체 아래에 속한다고 했다. 정치 공동체의 목적은 그 순간의 유익이 아니라 삶 전체, 모든 때를 향하기 때문이다. 이어 그는 옛 제사와 종교적 모임이 왜 수확 뒤에 열렸는지 적었다. "그때가 가장 여유로운 시기였기 때문이다." 주해자가 읽기에, 이 두 문장을 함께 놓으면 판단의 순서가 선다. 달리기 모임과 대회는 즐거움을 위한 작은 공동체이고, 그 정당성은 정치 공동체의 목적, 곧 시민 전체의 삶 아래에서 잰다. 그리고 옛 도시는 축제를 공동체가 가장 여유로운 시기에 열었다. 맹자의 주석가 주희가 사냥은 농한기에, 다리는 농사일이 끝난 달에 했다고 적은 것과 같은 관찰이다. 두 전통은 서로를 몰랐지만, 공동체의 큰일은 공동체가 감당할 수 있는 때에 연다는 데서 만난다.
주해 8 · 도시는 왜 축제를 여는가(『정치학』 3권 9장 · 『니코마코스 윤리학』 8권 9장)
- 풀이"거대한 사회적 공동체(the great Social one)"는 Chase 영역의 말로, 문맥상 정치 공동체(폴리스)를 가리킨다. 같은 장은 그 공동체가 "어떤 이익을 위해 결성되었고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고 하고, 입법자들이 "일반적으로 유익한 것을 정의로운 것이라고 주장하며 목표로 삼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한다. 3권 9장의 제사와 연회도 행복한 삶이라는 목적에 「기여하는」 것으로 놓였고, 8권 9장의 축제의 모임도 정치 공동체 아래의 부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축제를 금하지도 낮추지도 않았고, 그 자리를 전체의 목적 아래에 매겼다.
- 배경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제사와 모임'은 그리스 도시의 종교 축제다. 오늘의 체육 대회와는 성격이 다르고, 둘을 잇는 것은 시민이 함께 모여 즐기는 공적 행사라는 공통점에 기댄 빗댐이다.
- 휴담의 별자리에서아리스토텔레스 쪽 마디 「폴리스는 좋은 삶을 위한 공동체」 · 「스콜레(여가·관조의 시간)」가 이 두 대목에 닿는다. 그래프가 가리킨 곳을 원전에서 다시 확인했다.
- 휴담 도서관에서 읽기『정치학』 3권 9장 p0190 · 8권 9장 p0966 · p0967 · p0968
여기서 오늘의 어려움이 드러난다. 농경 사회에는 모두가 함께 쉬는 수확 뒤가 있었다. 오늘의 도시에는 그런 계절이 없다. 일요일 아침은 많은 사람에게 쉬는 때지만, 병원과 가게와 운송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일하러 가는 때다. 주해자의 생각으로는, 이 원리를 오늘에 대려면 '가장 여유로운 시기'를 달력에서 찾기 전에, 그 시간에 그 길을 꼭 써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세어야 한다.
셋째, 그는 공유물의 약점을 짚었다. 『정치학』 2권 3장에서 그는 소크라테스가 내놓은 처자 공유의 구상을 비판하며 이렇게 썼다.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것은 가장 적게 돌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보다 자신의 것을 더 소중히 여기며,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에는 각자가 해야 할 의무보다 덜 주의를 기울인다." 원래는 처자의 공유를 겨냥한 말이지만, 빗대어 읽으면 길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길은 모두의 것이어서, 버스 안에서 사라진 한 시간도 모두의 손실이 되고 끝내 누구의 일도 아니게 된다. 대회를 여는 쪽은 참가자를 돌보고, 버스는 노선을 돌리고, 승객은 각자 견딘다. 이 약점에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내놓은 답은 2권 5장에 있다. "재산은 사적으로 소유하되 그 사용은 공동으로 하는 것이 최선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시민들을 어떻게 그렇게 이끌 것인가는 입법자의 특별한 과제이다." 맡는 주인을 두되 쓰임은 함께 나누라는 것이고, 그 방법은 입법자의 몫으로 남겼다. 길은 공공의 것을 모두가 쓰는 것이라 이 답을 그대로 댈 수는 없다. 주해자가 보기에 길에 더 가까이 닿는 것은 6권 8장의 관직표다. 그는 필요한 관직을 차례로 꼽으며, 시장을 맡는 관리 다음으로 도시의 건물을 살피고 "도로가 적절히 보수되도록 하고, 서로 다른 사유지 사이의 경계표가 보존되어 그로 인한 분쟁이 없도록" 하는 관리를 두었다. 그리고 여유가 있는 도시라면 체육 활동과 극장과 "그 외에 있을 수 있는 모든 공적 구경거리"를 관리하는 자를 더 둘 수 있다고 했다. 두 대목을 잇는 것은 주해자다. 그의 관직표에서 길과 구경거리는 각자 맡은 사람을 가진다. 빗대어 읽으면, 대회를 맡은 사람은 있는데 그날 길의 일상을 맡은 사람이 따로 없다면, 버스 안의 한 시간은 그가 말한 "가장 적게 돌보는" 것이 된다.
주해 9 · 모두의 것과 그것을 맡는 관직(『정치학』 2권 3장 · 6권 8장)
- 풀이2권 3장의 문장은 플라톤 『국가』의 소크라테스가 내놓은 처자 공유의 구상을 겨냥한다. 여럿이 함께 가진 것은 각자가 맡지 않으므로 소홀해진다는 관찰이다. 6권 8장은 그 소홀함을 막는 장치를 보여 준다. 시장, 건물과 도로와 경계표, 도시 밖의 토지와 숲에 각각 관리를 두고,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는 이 일을 더 잘게 나누어 "도시 검사관"이라 부른다고 했다. 체육과 극장과 구경거리를 맡는 관리는 여유가 있는 나라에서 따로 둔다. 다만 2권 3장의 약점에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내놓은 답은 관직이 아니라 2권 5장의 「소유는 사적으로, 쓰임은 공동으로」다(아래 인용). 2권 3장과 6권 8장을 잇는 것은 주해자의 연결이다.
- 휴담의 별자리에서마디 「재산의 공유 대 사유 논쟁」 · 「공동선(코이논 아가톤)」이 이 대목에 닿는다.
- 오늘에 비추어주해자의 생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직표는 길의 일상과 구경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지는 도시를 그린다. 대회 날 그 두 손이 한자리에서 만나 서로를 조정하는 일이 오늘의 행정이 할 일이다. 원전은 그 조정의 절차까지 말하지는 않는다.
- 휴담 도서관에서 읽기2권 3장 p0089 · 2권 5장 p0096 · 6권 8장 p0370 · p0374
그를 편하게 읽어서도 안 된다. 원탁의 아리스토텔레스(AI)가 마지막에 인용한 "도시는 최선의 삶을 향유하기 위한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는 『정치학』 7권 8장의 정확한 인용이지만, 그 "평등한 자들"의 범위는 좁다. 같은 단락은 도시에 필요한 것이라고 모두 도시의 부분은 아니라고 하고, 이어지는 9장은 최선의 나라에서 시민은 기계적인 직업이나 상업에 종사해서는 안 되고 농부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덕을 기를 여가를 갖기 위해서다. 그가 그린 최선의 나라에서 여가와 축제를 누리는 시민은 농부와 장인과 노예의 노동 위에 서 있었다. 그날 서울의 버스 안에는 그가 시민으로 세지 않았을 사람들, 일하러 가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 한계를 걷어 내면 그의 원리는 오히려 더 날카로워진다. 도시의 축제가 시민 전체의 삶 아래에 놓여야 한다면, 오늘의 "전체"에는 그날 일하러 가야 하는 사람이 들어 있어야 한다.
주해 10 ·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의 바깥(『정치학』 7권 8·9장)
- 풀이"생명을 가진 재산"은 노예(와 가축)를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시에 꼭 필요한 것과 도시의 부분을 나누고, 농부·장인·상인의 노동을 앞의 것에 넣었다. 그의 "평등한 자들"은 여가를 가진 시민이었다.
- 걷어 낼 것과 남는 것시민의 범위를 노동하지 않는 사람으로 좁힌 전제는 오늘의 도시에 댈 수 없다. 그 전제를 걷어 내고 남는 것은, 공동체의 큰일을 공동체 전체의 삶 아래에 둔다는 원리다. 오늘 그 "전체"를 셀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빼놓은 사람들을 다시 넣는 것은 주해자의 적용이다.
- 휴담 도서관에서 읽기7권 8장 p0395 · 7권 9장 p0398
세 관점을 정리하면
휴담의 지식 그래프 「지혜의 별자리」에서 맹자·장자·아리스토텔레스를 함께 잇는 다리 개념은 일곱이고, 이 물음에는 그 가운데 국가·정의·덕이 닿는다. 맹자와 아리스토텔레스는 길을 비우거나 축제를 여는 일 자체를 막지 않았다. 맹자는 임금의 즐거움을 말리지 않았고 공평하게 다스리는 군자의 행차를 받아들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사와 연회를 도시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보았다. 『장자』는 세상의 즐거움 앞에서 판정을 보류했을 뿐, 길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세 책이 무게를 둔 곳은 서로 다르다. 맹자는 다스림의 공평함, 곧 백성이 건널 다리를 먼저 놓았는가에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작은 공동체의 즐거움이 정치 공동체 전체의 삶 아래에 놓였는가, 그리고 공유물을 누가 돌보는가에 두었다. 「칙양」은 서로 다른 것이 어느 하나에 치우침 없이 아울러지는가에 두었다. 주희가 적은 농한기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여유로운 시기'는 서로 모르는 두 전통이 비슷한 관찰을 적은 것이고, 「칙양」의 사계절은 그것을 한 해의 차례로 넓혀 읽게 한다.
주해 11 · 별자리의 다리
- 지혜의 별자리휴담 지식 그래프(도서관
/cerebro)에서 맹자·장자·아리스토텔레스를 함께 잇는 bridge 개념은 국가 · 정의 · 마음 · 덕 · 앎·지혜 · 이성·이치 · 사랑의 일곱이다. 이 글이 디딘 마디는 맹자의 「與民同樂 — 백성과 더불어 즐김」 · 「樂民之樂·憂民之憂」, 『장자』 쪽의 「至樂無樂」 · 「伯樂治馬」, 아리스토텔레스의 「폴리스는 좋은 삶을 위한 공동체」 · 「재산의 공유 대 사유 논쟁」 · 「스콜레(여가)」다. 그래프가 가리킨 대목은 모두 원전에서 다시 확인했다. - 때의 세 그림주희의 농한기와 농사일이 끝난 달(「양혜왕 하」 2장 주 · 「이루 하」 2장 주),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여유로운 시기」(8권 9장), 「칙양」의 대공조가 말한, 하늘이 어느 하나에 치우쳐 베풀지 않아 한 해를 이루는 사계절을 한 줄에 놓은 것은 주해자의 비교다. 앞의 둘은 공동체의 큰일을 공동체가 감당할 수 있는 때에 연다는 관찰이고, 「칙양」의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차례를 얻는다는 원리다. 세 원전이 서로를 안 것은 아니다.
- 공(公)의 두 그림맹자의 "백성들과 함께 사용했으니(與民同之)"와 「칙양」 대공조의 "뭇사람을 아울러 공정함을 이룬다(合并而為公)"는 모두 공을 수가 아닌 쓰임과 아우름으로 본다. 맹자는 그것을 다스리는 사람의 책임으로, 「칙양」은 치우침 없음이라는 도의 모습으로 말했다는 점이 다르다.
| 길을 막아도 되는가 | 정당성은 어디서 오나 | 막힌 사람에게 돌아갈 것 | 잘못 쓰기 쉬운 곳 | |
|---|---|---|---|---|
| 맹자 | 막지 않는다 — 다만 허락은 공평하게 다스리는 군자가 행차하는 동안 사람을 비키게 하는 것까지(오늘의 대회 통제는 빗댐) | 평소 다스림의 공평함, 먼저 놓은 다리 | 규칙으로 정한 대비와 보상(政) — 그때그때의 선처(惠)보다 | 행차의 허락을 남의 행사 통제로 넓히는 것 |
| 장자 | 판정을 보류한다 — 동의도 정죄도 아니며, 길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 서로 다른 것을 치우침 없이 아우름(公, 「칙양」) | 실질을 고친 배치(양행 — 빗댐) | 빈 배를 남에게 「참으라」는 말로 쓰는 것 |
| 아리스토텔레스 | 막지 않는다 — 축제는 도시의 목적에 기여한다 | 작은 공동체가 전체의 삶 아래에 놓임, 가장 여유로운 시기 | 공유물을 맡아 돌보는 사람(6권 8장 관직표 — 주해자의 연결) | 중용을 미리 정한 숫자로 읽는 것, 옛 '시민'의 좁은 범위를 그대로 두는 것 |
다시 그 질문으로
모두의 길을 어떤 이들의 즐거움을 위해 막아도 되는가. 원탁의 아리스토텔레스(AI)는 "누군가의 즐거움이 타인의 삶을 멈추게 한다면, 그 정당성은 사라집니다"라고 했고 다른 둘도 같은 쪽에 섰다. 그 기준대로라면 도시의 어떤 축제도 설 자리가 없다. 원전은 그보다 너그럽다. 맹자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과 축제 자체를 막지 않았고, 『장자』는 판정을 보류했다. 그렇다고 원전이 오늘의 대회 통제를 허락한 것도 아니다. 맹자의 허락은 공평하게 다스리는 군자가 행차하는 동안까지였다. 원전이 남긴 것은 허락보다 순서와 조건이고, 주해자가 그것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세우면 네 문장이 된다. 원전이 직접 말하지 않는 곳은 주해자의 판단임을 밝혀 둔다.
첫째, 길을 막기 전에 다리를 놓는다. 3만 5천 명이 기뻐한다는 사실도, 참가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사실도 그것만으로는 정당성을 만들지 못한다. 「이루 하」 2장에서 맹자는 다리를 놓지 않고 수레로 사람을 건네준 자산을 평하며 다리를 제때 놓는 일을 정치로 보았다. 빗대어 말하면, 오늘의 다리는 대회 날 도시가 미리 마련해 둔 다른 길이다. 버스가 어디로 돌고 어디서 끊기는지, 길을 건너야 하는 사람은 어디로 건너는지, 지하철 같은 다른 수단은 그날 넉넉한지. 이것들이 준비되지 않은 통제라면, 몇 명이 달리든 그 부담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버티는 몫으로 넘어간다.
둘째, 금지는 길에 들어서기 전에 알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원전의 말이 아니고 원전에서 끌어낸 주해자의 답이다. 맹자는 남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국경에서 스스로 큰 금지를 물었다. 손님이 묻는 것이 예법이던 때였다. 오늘의 도시에서 버스에 오른 시민에게는 물을 곳이 없다. 주해자의 생각으로는, 그래서 묻는 쪽과 알리는 쪽이 바뀌어야 한다. 빗대어 말하면, 오늘의 국경은 버스 정류장이고 지하철 개찰구다. 버스에 오른 뒤에야 길이 막힌 것을 알게 되는 통제는, 그 내용이 어딘가에 공지되어 있었더라도 승객에게는 갇힘으로 경험된다. 누구에게 언제 알려야 하느냐는 물음에 주해자가 내놓는 답은, 그 길에 들어서려는 사람에게 들어서기 전에다.
셋째, 얼마나 자주냐는 횟수의 상한보다 차례의 문제다. 원전은 한 해에 몇 번이 적당한지 말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중용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숫자가 아니다. 대신 「칙양」의 대공조는 사계절이 기운은 달라도 하늘이 어느 하나를 편들지 않아 한 해가 이루어진다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주희는 공동체의 큰일을 공동체가 가장 여유로운 때에 열었다고 적었다(주희는 사냥과 다리 공사,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사). 주해자의 판단으로는, 같은 길과 같은 시간대가 한 쓰임에 거듭 내주어지는지, 그 길을 그 시간에 꼭 써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따져 차례를 돌리는 일이 117이라는 숫자를 줄이는 일보다 먼저다. 117건 가운데 대규모 통제를 동반한 37건이 어느 길, 어느 아침에 몰렸는지가 이 물음의 실제 모양이다.
넷째, 막힌 사람에게 돌아갈 것은 규칙과 그 규칙을 맡은 사람이다. 원탁의 맹자(AI)는 한 시간을 갇혀 있던 시민에게 그 시간만큼 보상하자고 했고, 장자(AI)는 금전보다 존중받았다는 믿음을 말했다. 주희의 구분을 빌리면, 그날 사정을 보아 한 사람씩 챙기는 것은 은혜(惠)에 가깝고, 미리 정해 누구에게나 같게 적용하는 보상과 대비는 법도(政)에 든다. 주해자의 생각으로는, 보상을 하겠다면 규칙으로 정하는 편이 맹자가 말한 정치에 가깝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의 것이 가장 적게 돌봐진다고 했고, 그의 관직표는 길과 구경거리에 각자 관리를 두었다. 두 대목을 이어 읽으면, 대회 날 길에서 사라지는 시민의 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맡는 사람, 대회와 따로 그날 길의 일상을 책임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이 그날의 한 시간들을 적어 다음 대회의 우회로와 알림과 차례를 고친다면, 막힌 시민은 다음번의 다리를 돌려받는다.
달리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이 서로에게 지킬 도리도 이 위에 선다. 달리는 사람은 맹자가 왕에게 물은 것을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다. 내 즐거움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누군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 물음은 달리기를 그만두라는 데로 가지 않고, 대회를 고르고 여는 쪽에 다리를 요구하라는 데로 간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산목」은 빈 배를 일러 준다. 노여움의 과녁은 창밖의 이웃보다 다리를 놓지 않은 자리에 있다. 그리고 두 무리 모두에게 「추수」의 말이 남는다. 저마다 자기를 귀하다 하고 서로를 천하다 하는 것은 사물의 자리에서 본 것이다.
이 일이 서울만의 일은 아니다. 동네의 축제나 거리 행사처럼 길을 잠시 내주어야 하는 일 앞에서 독자가 자기 길에 대어 볼 물음을 세 책의 원리로 적어 둔다. 막힌 사람이 건널 다리는 미리 놓였는가(맹자). 그 금지는 길에 들어서기 전에 알 수 있었는가(맹자에서 끌어낸 주해자의 물음). 이 길의 차례는 돌아가는가, 한 쓰임만 거듭 편들어지는가(「칙양」). 그날 이 길의 일상은 누가 맡았는가, 우리가 말하는 '모두'에는 그날 일하러 가야 하는 사람이 들어 있는가(아리스토텔레스).
맹자는 자산의 수레를 두고 물었다. 어찌 모든 사람을 일일이 건네줄 수 있겠는가. 그 물음의 답이 다리였다.
출처
원전 (휴담 원천데이터의 원문과 국역으로 대조. 파일 경로·문단 id 는 「원전대조표_v0.1」. 인용 블록과 본문 따옴표 안의 우리말은 휴담 국역이고 고친 곳에 「필자 다듬음」을 달았다. 본문 괄호 속 한문의 우리말은 휴담 국역을 참고해 필자가 풀었다.)
- 『맹자』 「양혜왕 상」 2장 · 「양혜왕 하」 1장·2장·4장 · 「이루 하」 2장 — 원문과 휴담 국역
- 주희, 『맹자집주』 「양혜왕 상」 2장 · 「양혜왕 하」 1·2·4장 · 「이루 하」 2장 — 『사서집주』 원문과 휴담 국역(원천데이터)
- 『장자』 「제물론」 · 「마제」 · 「추수」 · 「지락」 · 「산목」 · 「경상초」 · 「칙양」 — 원문과 휴담 국역(외편·잡편은 『장자』나 편 이름으로 쓰고 장자 본인의 말로 단정하지 않았다 — 내편 「제물론」만 장자의 말로 씀)
-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2권 3장(1261b) · 5장(1263a) · 3권 9장(1280b~1281a) · 6권 8장(1321b~1323a) · 7권 8장(1328a~b) · 9장(1328b~1329a) — 원문은 휴담 원천데이터의 영역본(Ellis), 국역은 휴담 국역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 6장(1106a~b) · 8권 9장(1159b~1160a) — 원문은 영역본(Chase), 국역은 휴담 국역. 장 번호는 표준(Bekker) 분장 기준이며, Chase 영역에서 2권 6장은 Book II Chapter V 에 해당한다.
휴담 지식 자료
- 저자 지식 노트: 「장자 — 무위(無爲), 원전에서」
- 지혜의 별자리: 맹자·장자·아리스토텔레스를 함께 잇는 bridge 개념 7개 가운데 국가 · 정의 · 덕 / 마디 「與民同樂」 · 「樂民之樂·憂民之憂」 · 「至樂無樂」 · 「伯樂治馬」 · 「폴리스는 좋은 삶을 위한 공동체」 · 「재산의 공유 대 사유 논쟁」 · 「스콜레(여가)」
실마리: KBS, 「"15분 거리를 1시간 걸렸다"…서울 시민들은 왜 분노하나 [잇슈#태그]」, 2026년 11월 1일 16:55 (기사)
원탁 대화: 지혜의 원탁 「모두의 길은 누구의 것인가」(맹자·장자·아리스토텔레스), 2026년 11월 1일 (사랑방 공개본)
휴담 도서관에서 읽기
인용한 구절을 휴담 도서관에서 그 단락으로 바로 여는 링크다. 도서관 문단 번호는 원천데이터 번호와 다를 수 있어 도서관 사본에서 원문으로 다시 찾았다.
- 『맹자』 「양혜왕 상」 2장 — 與民偕樂펼치기
- 「양혜왕 하」 1장 — 獨樂樂·與人樂樂펼치기
- 「양혜왕 하」 1장 — 與少·與眾펼치기
- 「양혜왕 하」 1장 — 不與民同樂펼치기
- 「양혜왕 하」 1장 — 與民同樂 則王矣펼치기
- 「양혜왕 하」 2장 — 문왕의 동산과 나라 안의 함정펼치기
- 「양혜왕 하」 4장 — 樂民之樂펼치기
- 「이루 하」 2장 — 자산의 수레, 行辟人可也펼치기
- 주희 『맹자집주』 「양혜왕 상」 2장 · 「양혜왕 하」 1·2·4장 · 「이루 하」 2장도서관 미수록(원천 대조)
- 『장자』 「제물론」 — 조삼모사·양행펼치기
- 「마제」 — 백락펼치기
- 「추수」 — 以道觀之펼치기
- 「추수」 — 何為乎·反衍펼치기
- 「지락」 — 부유한 자펼치기
- 「지락」 — 무리 지어 달려감펼치기
- 「지락」 — 천지는 무위하면서도펼치기
- 「산목」 — 빈 배펼치기
- 「경상초」 — 動以不得已之謂德펼치기
- 「경상초」 — 緣於不得已펼치기
- 「칙양」 — 구리의 말펼치기
- 『정치학』 2권 3장 — 공유하는 것은 가장 적게 돌본다펼치기
- 『정치학』 2권 5장 — 소유는 사적으로, 쓰임은 공동으로펼치기
- 『정치학』 3권 9장 — 제사와 공공 연회, 인간답게 살기 위해펼치기
- 『정치학』 6권 8장 — 도로와 경계표펼치기
- 『정치학』 6권 8장 — 공적 구경거리펼치기
- 『정치학』 7권 8장 —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펼치기
- 『정치학』 7권 9장 — 시민의 직업펼치기
- 2권 6장 — 우리와 관련된 중간펼치기
- 8권 9장 — 모든 공동체는 정치 공동체의 부분펼치기
- 8권 9장 — 선원·전우·부족펼치기
- 8권 9장 — 제사와 가장 여유로운 시기펼치기
원탁에서 현자들이 한 말은 각 현자의 원전을 바탕으로 한 AI의 응답이며 실제 인물의 말이 아닙니다. 이 글의 원전 인용은 휴담 원천데이터의 원문과 대조했고, 국역을 고친 곳에는 「필자 다듬음」을 달았습니다. 사안은 언론 보도를 요약했고 특정 대회나 개인을 가리키는 정보는 더하지 않았습니다.